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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Jun 11. 2024

4-2. 중국발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한국발 괘씸죄

제4장. 비극,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미국 법인장이랑 주재원을 한꺼번에 교체할 계획이라고 하는구먼. 주재원은 이미 교체하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지 아마?”     


“네 맞습니다. 회장님, 지난달 주재원은 이미 공모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지금 대표이사의 바로 전 비서가 주재원으로 선발됐습니다. 둘 다를 한꺼번에 교체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회장님, 아무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도 해외 사업을?”     


“자네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인사는 그런 게 아니야. 경험자를 선택하던 경험이 없는 사람을 선택하던 그건 인사권자 마음이야. 아니면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아무튼 내 말을 끝까지 잘 들어. 인사는 정치랑 다를 게 없어. 사업은 중요하지 않아 누가 내 사람이냐가 중요하지. 일단 자네는 지금 대표이사 사람은 아닌 게 확실하네.”     


“휴~~~ 우!” 나도 몰래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누군가에 의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지금까지는 오직 시험을 통해서만 승진했다. 하지만 직급이 높아지면 더 이상 시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정치라는 건 누군가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목표를 이룰 수 없는 것 아닌가?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자는 공천권자와 투표권자에 의존해야 하고 회사에서 승진하려는 자는 인사권자에게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의존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게 되어 있다. 회장의 말대로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게 확실한 듯했다. 나의 긴 한숨을 위로라도 하듯 회장이 말을 이었다.     


“인사라인에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는 나도 몰라.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내가 자네를 위해 특별히 두 가지를 부탁해 뒀어. 첫째는 미국에서 내년 말까지 1년 더 근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였고, 둘째는 내년 말에는 무조건 승진시켜서 국내로 복귀시키라는 거야. 내가 비록 회장직에서는 물러났어도 그 정도 약속은 지켜줄 걸세. 아무튼 속 많이 상했을 텐데 몸 잘 추스르고 들어오거든 연락 한 번 하게나.”     


전화를 끊자마자 나를 지탱하고 있던 모든 에너지가 증발하는 듯한 무력감에 나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허탈감은 결코 승진과 인사 때문이 아니었다. 3년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불과 몇 분짜리 전화 한 통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충격적 사실은 나의 온몸과 영혼에서 가장 중요한 정수를 뽑아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문득, 언젠가 도축장을 견학했을 때 목격했던 소의 최후가 떠올랐다. 누군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 찌운 그 커다란 소는 정수리에 꽂히는 단 한방의 충격에 나무토막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소의 목덜미에 커다란 칼을 꽂으면 쓰러진 소는 네 발을 버둥거리며 생을 마감한다. 목덜미로 솟구치는 피로 인해 비린내가 진동했다. 나는 나의 미국에서의 3년과 송아지가 소가 되는 3년이 참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목구멍에서 비릿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새해에도 태양은 떠올랐다. 회장과의 통화가 있고 난 뒤 그 무엇 하나 시원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어수선한 새해가 밝았다. 정기 인사철이 모두 마무리됐음에도 주재원에 대한 인사는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찜찜함을 남겨두었고, 그사이 그나마 나의 편이 되어주었던 김주환 사장과 회장의 퇴임식이 있었다. 이제 오롯이 혼자였다. 그것도 그냥 혼자가 아닌 애꿎은 돌팔매로 골리앗의 성을 돋운 정말 보잘것없는 혼자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아니면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는 건지 중국의 우한이라는 곳에서 이상한 바이러스가 발견됐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리고 중국발 바이러스의 공격과 함께 동시다발적인 골리앗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이 현 법인장, 잘 지내지? 아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이번에 자회사로 발령받았어. 어찌하다 보니 미국 법인을 담당하게 됐네. 근데 오자마자 위에서 왜 이렇게 주문이 많아? 일단 중요한 거 두 가지 먼저 알려줄 테니까 준비 좀 해 줘야 할 거 같아. 부탁 좀 할게.”     


자회사에 새로 부임한 백 부장의 전화였다. 백 부장과는 입사 동기로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서로 흉금을 터놓을 정도의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 원하지 않게 자회사로 발령을 받은 그의 목소리에는 귀찮음과 짜증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일단, 첫 번째 안건은 말이야, 지난해 법인장이 취급한 신제품 있잖아? 그게 문제의 소지가 많다는 윗분들의 의견이야. 본사 보고나 승인 절차가 제대로 안 됐다는 거지. 법인장은 김주환 사장이 구두로 승인했다고 말하지만 증명할 근거가 없어. 그거 전면 재검토하라는 지시야.”     


“야 백 부장, 지금 나랑 장난해? 지난해 있었던 일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나한테 일부러 이러는 거야? 신제품 아니었으면 미국 법인은 애저녁에 문 닫았어야 해. 그리고 지금 전면 재검토라면 취급하지 말라는 말밖에 더 돼? 그거 지금 생산 중단하며 회사 매출 반으로 줄 건 안 봐도 알 일이야. 근데 그걸 나한테 재검토하라고?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거 같아? 그랬다가 경영 실적 나빠지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건데? 백 부장 당신이 질 거야? 아무튼 나는 내 재량으로 취급 중단할 일은 없어. 그러니까 제품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취급 중단하라는 문서를 보내. 대표이사 새끼던 사장 새끼던 공문에 도장 찍어서 보내라고. 그전엔 나 절대 책임질 일 안 할 거니까. 그리고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 두 가지 중 나머지 한 가지는 또 뭐야?”     


“야 왜 나한테 성질이야 성질이? 나도 갑자기 이 일 맡아서 머리 아파 죽겠구먼. 좋아. 말 나온 김에 있는 대로 다 말할게. 사실 신제품 문제보다 두 번째가 더 심각한 문제야. 너보다 앞서 초대 미국 법인장으로 근무했던 신기원 전무 알지?”     


“알다마다, 그 인간 퇴직하고 경쟁사로 들어갔잖아. 미국에서도 몇 번 마주쳤어. 그런데 그 인간이 우리 거래처 뺏어가려고 안달이 나 있더라고. 한 번은 워싱턴주에 있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우리 거래처를 몰래 만나고 있는 거야. 나를 보고는 놀라서 아는 체도 안 하고 도망갔어. 근데 그 인간은 또 왜?”     


“그래 네 말대로 그 인간, 근데 그 인간이 새로 부임한 자회사 사장님이랑 입사 동기인 거 알아? 그리고 대표이사님이랑도 엄청 친하대. 그 인간을 미국 현지 법인장으로 검토하라는 지시야. 아무튼 나는 아무것도 몰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니까 나한테는 뭐라고 할 생각 하지 마. 하여간 확실한 건 그룹 본사나 자회사에서는 법인장 현지화를 강력하게 추진할 거라는 거야. 그러니까 검토 의견 작성해서 제출해 줘. 알았지?”     


역겨움에 또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리고 회장이 말했던 법인장과 주재원 동시 교체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미국에서 영주권을 취득해 현지 채용 요건을 갖춘 신기원 전 전무라면 초대 법인장을 지낸 경험을 앞세워 나와 진화식을 동시에 교체시킬 명분이 된다. 아니, 어쩌면 나와 진화식을 동시에 교체하고 주재원으로 뽑힌 전 비서를 미국에 합류시킨다면 여기는 그들만의 왕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 나의 존재는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도대체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신기원을 현지 법인장으로 만든다는 건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회사를 떠나 경쟁사의 임원을 지낸 사람인 데다 현지 법인장이라면 한국에서 가할 수 있는 어떤 통제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한마디로 고액 연봉과 엄청난 사업적 재량은 가지되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롭다는 뜻이다. 그에게 이런 혜택을 주면서까지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그 대가로 취하려 하는 걸까?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말은 이런 일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리라. 내 맘속에 다시 불기둥 하나가 치솟아 올랐다.

      



나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았다. 신제품을 계속 생산해 회사의 경영을 유지했고 사상 유례없는 호실적을 기록했다. 직원들에게 더 많은 급여와 복지 혜택을 제공했고 그로 인한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단 하나 좋지 못한 건 오로지 나의 마음 하나였다. 결국 회사는 자기들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 있는 것에 관해 그 어떤 공식적인 의사결정도 하지 않았고, 비공식적으로 진행하던 법인장 현지화 계획은 나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수포가 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죽을 땐 역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죽은 뒤엔 충신이 되었다는 사육신의 묘비에 남은 건 제대로 된 이름 석 자가 아니었다. 겨우 성씨 한 글자만 새긴 초라한 묘비였다. 3년의 세월이 나에게 남긴 건 무엇일까? 소신껏 일하면서 업적을 쌓을수록 나는 점점 ‘고립무원 孤立無援’의 외로움을 느꼈다. 몸부림칠수록 현실은 점점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2월이 되자 코로나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코로나가 퍼지는 만큼 세상은 사람을 가두려 했지만, 웬일인지 한국에 있는 자들은 나를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그사이 정계 진출을 꿈꾸던 전 회장의 낙마 소식이 전해졌고 그 소식과 함께 자회사에 새로 부임한 인사부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현 법인장, 그동안 미국에서 고생했어. 이제 들어와야지?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어. 쯧쯧, 자네 괘씸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몰라?”     


“뭐요? 잘 좀 하지? 내가 뭘 잘 못 했는데? 지금 인사발령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인사철도 아닌데 누구 맘대로? 대기업에서 인사를 이 따위로 한다고? 이게 무슨 구멍가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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