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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Jun 14. 2024

4-3. 인사발령,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제4장. 비극,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수치심, 자괴감, 분노, 후회 그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은 요동쳤다. 끌어줄 동문 선배 하나 없는 지잡대 출신인 나,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디 하나 하소연할 곳 없는 나는 오직 진심 하나를 신앙처럼 믿고 살아왔다. 윤리와 도덕을 공부하며 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이치대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 事必歸正’을 종교처럼 믿었던 나에게 ‘옳음(正)’이라는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니체의 말처럼 세상엔 말도 안 되는 속임수만 난무할 뿐 신은 죽고 없었다.     


그들이 원하던 법인장 현지화 계획이 사실상 물 건너가자 그들은 다른 카드를 들이밀었다. 진화식과 교체하기 위해 공모로 선발한 대표이사의 전 비서 손민수를 진화식이 아닌 나와 교체하겠다는 거였다. “분노가 커질수록 자괴감은 줄어든다.”라고 말한 심리학자는 도대체 이런 일을 겪어나 보고 그런 말을 했을까? 분노가 치솟아 오를수록 나의 자괴감은 더욱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당당하게 직원들 앞에 서서 어려운 회사를 이끌던 리더로서의 나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능력 있는 남편이요 믿음직한 아버지였던 나도, 의욕과 자신감에 넘치던 나의 존재도 모두 사라지고 수치심에 종일 얼굴이 붉게 굳어버린 부끄럽고 처량한 한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나는 대표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이사님, 현해원입니다.”     


그래뭔데짧게 말해라!”     


“짧게요? 지금 상황이 ‘짧게’가 가능한 상황이 아닙니다. 저한테 뭔가 큰 오해가 있으신 거 같습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알려주십시오. 제 이야기도 한 번은 들어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뭔 소리야인사 문제라면 인사팀장이랑 얘기해라지금 행패부리나?     


“뚜~우~~ ” 대표이사의 짜증 가득한 냉랭한 목소리는 이내 전화기의 신호음 너머로 사라졌다. 가차 없이 끊어버린 전화에 갑자기 오기가 턱 하고 받혀 나도 몰래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너나 나나 월급쟁이 기는 매한가지야. 그 자리 천년만년 갈 줄 알아?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구녕에선 언젠간 피눈물 날 줄 알아야지. 내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아. 내가 너랑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이대로 물러서진 않을 거야. 이런 씨 XXX!”     


홧김에 막상 혼자 소리 질러봤지만 나로서는 달리 이 난관을 헤쳐나갈 도리가 없었다. 모든 권한과 조직을 가진 그들 앞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한다 한들 그들에겐 한낱 행패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더 초라해지기 전에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들은 공식 인사문서 한 장 없이 주재원으로 선발된 손민수 차장을 법인장으로 지목했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은 미국에서 8년을 지낸 진화식이 아닌 나로 바뀌었다. 이건 도대체 누굴 위한 인사란 말인가? 차라리 정기 인사철에 공식적인 문서에 의해 인사가 이루어졌다면 이보다 더 비참하진 않았으리라. 이렇게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밀실 인사를 기다리는 심정은 그야말로 언제 호명되어 끌려나갈지 모르는 사형수의 심정과도 같은 것이리라. 그사이 새롭게 법인장이 될 손민수 차장이 미국 법인에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 왜 그들에게는 그렇게 쉬운 걸까? 공식 인사문서도 없는 상태에서 손민수가 미국엘 온다는 소식에 진화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법인장님, 손민수 차장이 온다는데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왜 헷갈려그냥 대표이사님이라고 불러드려앞으로 네 목숨줄 쥔 사람이잖아아니면 하느님도 좋겠다 야!”     


손민수가 대표이사의 비서였다는 것과 얼마 전까지 그룹 인사팀의 일원이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진화식에게 내가 해줄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뿐이었다.          






돌아갈 모든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즈음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를 팬데믹으로 선언했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는 소식이 잇따랐다. 세상은 급하게 모든 이동을 제한하기 시작했지만 코로나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며 비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런 비극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생겨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입국 금지조치를 예고했고 한국에 있는 미 대사관에서는 비자 발급 인터뷰를 중단하겠다고 예고했다. 그 말은 손민수가 아무리 미국엘 오고 싶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올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비자 발급 없이는 법인장으로서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어쩌면 신은 아직 나를 저버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가족이었다. 한국 복귀로 인해 나의 비자가 상실되면 나에게 딸린 가족들의 비자도 자연적으로 사라진다. 그동안 다니던 공립학교에서 더 이상 무료 수업이 불가능하고 심지어 학기가 끝날 때까지 전학을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의료혜택이 없어진다는 거였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에 설령 확진자가 되어 음압병동 신세라도 지는 날에는 무보험자가 감당해야 할 의료비는 가히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나는 간곡한 사연을 전달하기 위해 자회사 인사부장에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지금 미국은 코로나로 난리가 났습니다. 마음 같아선 저도 당장 들어가고 싶은데 가족들이 문제입니다. 아직 공식 인사도 안 난 마당에 아이들 학기가 끝나는 6월까지만 근무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국내 복귀로 비자가 사라지면 자칫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정도는 위에서도 용납해 주지 않겠습니까?”     


기대와는 달리 나의 간곡한 부탁은 어느새 독화살이 되어 나에게 날아왔다. 그들이 계획하던 인사에 빨간불이 켜지자 그들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인사발령도 나지 않는 손민수의 비자를 급하게 추진해 대사관이 문 닫기 1주일 전 인터뷰를 통과했고, 비자가 나오자 한국인 입국 금지가 시작되기 직전 손민수를 미국으로 급파했다. 007 작전을 능가하는 민첩함이었다. 살다 살다 이런 인사는 처음이었다. 졸지에 한 사무실에 법인장이 둘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다. 문서도 없이 떡하니 와 있는 놈 하나, 문서는 있어도 영혼이 탈탈 털려 넋 나간 놈 하나, 어떤 놈이 진짜일까? 나는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인사부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거 봐요. 부장님, 지금 신종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는 판국에 본사에서 대응하느라 신종 코미디 개발했습니까?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인사요? 아무리 대표이사 비서에 그룹 인사과 출신이라고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겁니까? 내가 아무리 가진 거 없고 빽도 없다지만 이건 동료 직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데 아예 나를 꿈틀거리지도 못할 때까지 짓밟을 셈이요? 이건 인사가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모독이자 모욕 아니요? 부장님이 말하던 괘씸죄에 대한 벌이 이런 거였소? 아무튼 들어가서 봅시다. 나도 가족이 어떻게 되든 이젠 상관 안 하고 들어갈 거니까 당장 문서 띄우세요. 사장, 대표이사 어떤 놈이든 내가 직접 가서 해결할 거니까 빨리 공식 인사문서나 보내 주세요.”     


전화를 끊고 나자 머릿속에서 ‘분신자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마음은 이미 시너 통을 메고 대표이사실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날이 되자 졸지에 한 지붕 두 법인장이 된 손민수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법인장님, 가족분들과 6월까지 계실 수 있게 해달라고 본사에 요청한 거 말입니다. 제가 대표이사님과 사장님께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지금 바로 들어가시는 건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을 듯합니다. 자녀분들 학교 문제도 그렇고 특히 코로나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걱정되면 좀 천천히 오지 그랬어? 고양이 쥐 생각한다더니 퍽 고맙다!’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지는 않았지만 마치 눈과 몸에서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이도 한참 어린 데다 승진도 10년이나 늦은 후배는 당당하게 고양이가 되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에게 후한 인심을 베풀고 있었다. 도대체 그와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제는 그 어떤 의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사무실에서 3년을 넘게 함께했던 직원들에게 면목이 없을 따름이었다.      


사업을 전쟁에 비유한다면 나는 그 어떤 전투에서도 패배하지 않았다. 오히려 혁혁한 전과를 올려 숱한 적장의 목을 베어다 바쳤건만 직원들 앞에서 나는 왠지 초라한 장수, 아니 초라한 패잔병이 되어 있었다. 적의 목을 벤 죄로 나는 천하의 역적이 되어 전장에서 물러난다. 비록 목 베이지는 않았으나 아군에 의해 영혼이 참수된 나는 더는 설 곳이 없었다.      


며칠 후 공식 인사문서가 날아들었다. 인사문서를 보는 순간 나는 새어 나오는 실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그들은 나를 웃기는 코미디언이 된 걸까? 때로는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일에서도 웃음이 나올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깨달았다. 손민수에게 문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아니 손 법인장, 인사팀 출신으로서 이런 인사발령 문서 전에 본 적 있어? 참 웃기지도 않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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