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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Jun 18. 2024

4-4. 부처님도 울고 갈 3가지 신통력

제4장. 비극,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법인장 현지화에 실패하자 대신 주재원으로 뽑은 손민수를 법인장으로 발령했다. 그것도 정기 인사철이 아닌 연도 중에 급조된 인사에는 말도 안 되는 날짜와 단어들이 마구 섞여 있었다. 나는 인사권자가 부리는 요술 같은 3가지 신통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신통은 변신술로 사람을 바꾸는 것이었다. 주재원으로 뽑은 사람을 순식간에 법인장으로 바꾸어냈다. 공모에서부터 결과 발표까지 모두 주재원이라고 공문이 나갔지만 그 정도를 바꾸는 일은 그들에게 그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창조술이다. 정기 인사철이 아님에도 그들은 마음대로 빌미를 만들어 새로운 인사 일정을 만들어 냈다. 연말에 모두 끝나야 할 인사를 자기들 입맛에 맞추려고 뭉그적거리다가 3월에야 인사하는 능력은 설마 하던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세 번째 신통력이 압권이었다. 그건 바로 타임머신이다. 그들은 미래의 사람을 미래의 공간에 미리 보내는 시공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아직 공식 발령 문서도 없이 사람을 미리 보내더니 뒤늦게 공식 인사를 단행했다. 인사문서의 비고란에 빼곡하게 적어 넣은 그들의 타임머신 주문은 이랬다.      


“지금 보낸 사람은 두 달 후부터 법인장이 될 것이니 알아서 잘 모시거라!”     


4월에 효력이 발생하는 인사문서를 내면서 6월의 어느 날부터 법인장이 될 거라고 비고란에 적어 넣은 꼴이 그들의 급조된 인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6월에 공식 인사를 했으면 될 일이다. 명분 없이 사람을 미리 미국에 보낸 후 코로나 사태로 인한 나의 반발이 거세지자 그들은 나름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그룹 역사상 이런 말도 안 되는 인사를 자행했다는 증거 하나는 나에게서 영원히 뺏어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때 새삼 깨달았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웃음이 된다.”라는 것을. 그들이 발휘하는 신통력에 대응이라도 하듯 나에겐 어느 순간부터 분노하는 나를 관찰하는 능력이 생겼다. 분노가 극에 달하자 갑자기 분노하는 나 자신을 누군가가 거울에 비춰주는 듯했다. 요괴스럽게 얼굴을 찌푸린 내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이내 제3의 내가 나타나 묻는다. “너 뭐 하냐? 그깟 게 뭐라고?” 그러면 이상하게 웃음이 터졌다. ‘설마 내가 미친 건가?’     


20세기 미국의 수필가인 ‘아그네스 리플라이어(Agness Repplier)’는 유독 웃음과 유머에 관한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나는 그녀의 문장에서 나의 분노가 웃음이 된 이유를 찾았다.     


“유머의 본질은 예상치 못한 것이어야 하고 놀라움의 요소를 담고 있어야 한다. 습관적인 사고의 틀에 갇힌 합리적인 중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The essence of humor is that it should be unexpected, that it should embody an element of surprise, that it should startle us out of that reasonable gravity which, after all, must be our habitual frame of mind.”     


나에게 그들의 인사는 아그네스가 말한 유머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놀라움이 끊이질 않았고 대기업에서 이루어지는 인사라고 하기엔 완전히 습관적인 틀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합리적인 중력과 더불어 이성마저도 무참히 깨트린 행위였다.      


3년 전 처음 시애틀을 통해 미국으로 들어오며 내가 스스로 다짐한 게 있었다. ‘웃으면서 왔으니 웃으면서 떠나가겠노라!’. 결국 그들의 신통력과 코미디로 인해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셈이다. 삶은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가는 거지만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제 웃으며 떠날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은 한국에만 있는 말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불행은 그저 불행일 뿐이고 그 불행 중에도 좋은 일은 있기 마련이다. 유독 한국 사람들은 그런 불행을 잠깐 일어난 좋은 일에 버무려 희석하는데 뛰어난 재주가 있다. 나는 그걸 “비빔밥 근성”이라 부른다.      


다행히 나와 정해진에게도 기다리던 영주권이 나왔다. 이제 나는 최소한 두 가지에 관해서는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는 가족들의 거주 신분이 생겨 원하는 만큼의 학업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해진 과장이 더 이상 영주권으로 인한 설움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이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정해진에게 미국의 인력시장은 연신 러브콜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 러브콜은 비단 정해진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쏟아졌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시골 마을에 있는 이름 모를 공장이었던 회사는 부도 직전 기업으로 내몰려 존폐의 갈림길에 처해있었다.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직원은 사무실 직원들을 위협하며 총질을 해대고 있었다. 사업과 관련된 파트너사들은 무능한 동양인이 운영하는 회사를 비웃었고 직원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3년이 지난 지금, 나를 만난 주지사는 한국을 방문해 대표이사를 예방했고 파트너사들의 신뢰는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회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경영은 사상 유례없는 실적을 거두었고 자본 잠식에 허덕이던 회사는 3년 연속 흑자와 함께 완전히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직원들의 급여와 복지혜택은 최고 수준으로 올랐고 이직률이 높기로 유명한 생산직들도 회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사이 나의 소문은 알게 모르게 미국 사회에 알려졌고 몇 군데 유망한 사업주들로부터 채용과 협업 제안이 들어왔다.     


‘나를 버린 회사’ 생각 같아서는 나도 회사를 버리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오래된 꿈이 있었다. 금융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많은 금융 관련 자격증을 가지고 전문가로서 살아오던 삶을 하루아침에 접었다. 그리고 지금의 사업 분야에 도전했다. 그 이유가 바로 대표이사가 되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지금 나에게 모진 인사권을 행사하는 바로 그 자리, 그 대표이사가 되기 위해 나는 지금껏 달려왔다. 그렇게 쉽게 포기될 꿈이라면 애초에 꾸지도 말았어야 했다. 이 정도의 시련에 좌절되기에는 아직도 나의 꿈이 너무나 강렬했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젠 새롭게 법인장이 될 손민수에게 나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일러주고 있었다.     


“손 법인장 잘 들으세요. 사무소장끼리의 인수인계는 때로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도 있어요. 나도 사람인 이상 잘못 볼 수 있지만 내가 3년 넘게 보아온 것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간추려 말할게요. 첫 번째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겁니다. 근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진화식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법인장은 아직 실무 경험이 없으니 모든 걸 진화식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진화식에게 그 어떤 의사결정도 위임하면 안 됩니다. 진화식은 이미 법인장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어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넘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에요. 역대 법인장 모두의 의견이니 허투루 듣지 말고 꼭 챙기셔야 합니다.”     


“네 법인장님, 저도 한국에 있는 동안 많은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직원들에게 앞으로 저의 사업방침에 대해 전달했습니다. 모든 건 현 법인장님이 하던 그대로 하라고요. 그 어떤 것도 바꿀 생각 하지 마라고요.”     


나는 속으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고작 그대로 따라 할 사람을 보내려고 그들은 그렇게 간절했던 것인가?’ 나는 진화식이 알게 모르게 해 왔던 거짓말과 속임수를 낱낱이 알려주며 그에게 당부했다.     


“정해진을 놓치면 회사가 어려워질 겁니다. 이제 그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진화식과 정해진이 같은 동갑내기이지만 서로 갈등이 보통 심한 게 아닙니다.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회사를 위해 진심으로, 양심적으로 일할 사람은 진화식이 아니라 정해진입니다. 활용도를 높이고 더 좋은 대우를 해주셔야 할 겁니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는 거 꼭 잊지 마세요. 그리고 나도 돌아가면 어차피 해외 사업 업무를 맡아야 할 것 같으니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비록 나는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떠나지만 법인장은 행복하게 웃으며 떠나길 바랄게요. 그동안 모든 법인장이 비극적으로 돌아갔지만, 손 법인장은 그 징크스를 꼭 깨길 바랍니다!”     


“네 법인장님, 명심하겠습니다. 법인장님이 이렇게 진솔한 분이라는 걸 대표이사님이 아셨다면 절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셨을 텐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도 와서 몇 달 지내고 나서야 느낀 건데, 한국에서 너무 많은 오해를 하고 계신 듯합니다. 제가 오해가 풀릴 수 있도록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법인장님!”          






회사가 제공하는 마지막 항공 티켓을 들고 전 가족이 시애틀 공항을 향했다. 세상은 코로나로 인해 폐허가 된 듯했고 나의 마음도 그랬다. 마지못해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진화식은 출국 수속을 밟기도 전에 서둘러 등을 돌렸다. 그에게는 또 다른 광명이 찾아온 것이다. 나를 보내며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진화식이 외치는 기쁨에 찬 환호성이 계속 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결국 괴로움은 ‘떠남’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나는 깨달았다. 남는 진화식과 손민수 그리고 떠나는 나를 비교하는 데 괴로움이 있었다. 그런 나의 괴로움을 어떻게 알았을까. 주재원 모임에서 알게 된 항공사 점장이 나타나 우리 가족을 위해 라운지 무료 이용권을 건넸다. 라운지에는 그동안의 삶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가장 독한 위스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한국, 코로나로 인해 강제 격리된 채 한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승진을 포기할지언정 결코 대표이사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겠다던 나의 결심이 무너지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나의 일을 대하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를 걱정해 주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전화와 회유에 못 이긴 나는 첫 출근과 동시에 대표이사를 만나기로 했다. 내심 나도 대표이사의 태도가 궁금했다. 어떤 표정으로 나를 대할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다시 자회사로 복귀한 나는 무려 인사본부장이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룹 본사의 대표이사실을 향했다. “똑똑”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대표이사님!”     


“어 그래 법인장 왔나?”     


“네? 법인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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