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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y 17. 2024

3-2. 영주권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3장. 음모,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진화식에게 날아든 영주권은 우리 같은 사무직 노동자로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종류의 영주권이었다. 그가 받은 영주권은 2년 이상 숙련된 기술 노동자에게 발급되는 거였다. 그리고 그런 영주권이 나오려면 최소한 3년 전에는 영주권이 신청되었어야 한다. 나는 의문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같은 변호사를 통해 더 싸고, 더 쉽게 영주권을 발급받자는 나의 제안에 끝끝내 거부하며 자기가 아는 변호사를 통해 신청하겠다더니, 그렇게 고집했던 데에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혼자만 영주권이 이렇게 빨리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진차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영주권이 혼자만 나온 거지? 그리고 영주권 카테고리는 또 왜 이래? 숙련 노동자?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야?”     


“어, 어, 어, 네 법인장님, 그게 제가 알아봤는데요. 가끔 이민국에서 실수로 카테고리가 바뀌어서 나오는 경우가 있답니다. 저도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이게 이렇게 나왔는지 말입니다.”     


그는 마치 주판알을 튕기듯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연신 교차하며 대답했다. 그건 그가 거짓말을 하거나 곤란한 대답을 억지로 할 때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진화식의 거짓말은 늘 이런 식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질 일이거나 아주 작은 확인으로도 들통날 수 있는 거짓을 그는 정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하지만 그의 엄지와 검지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정을 얘기했더라면 나는 오히려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정해진을 통해 알아본 결과 그는 이미 내가 부임하기도 전에 영주권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고 영주권이 나오게 되면 바로 들통날 게 두려워 내가 부임하자마자 영주권의 중요성에 대해 사흘이 멀다고 강조하며 나를 부추겨 왔던 거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연말 인사에 진화식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젠 한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이유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진화식은 끝끝내 자신의 거짓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주권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이민국에 확인한 결과 영주권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음이 밝혀졌다.      





어느덧 계절은 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국 북서부에 여름이 온다는 건 지루했던 우기가 끝난다는 의미이다. 이제 본격적인 건기가 시작되면 여름이 다 지나도록 비 한 방울 구경하기 힘들다. 한국과는 달리 여름은 건조하고 청량하기 그지없다.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여름에도 나무 그늘은 시원함을 넘어 서늘함을 느낄 정도다. 그리고 여름이 의미하는 또 한 가지, 그건 많은 사람이 저마다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들이닥칠 거라는 의미다. 미국에 많은 손님이 찾아온다는 건 어찌 보면 힘든 일이지만 긍정적인 면도 많았다. 미국에 오는 사람을 나의 우군으로 만들기에 이처럼 좋은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미국 땅에서 믿을 만한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대부분 사람은 이미 나의 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편이 되었던 뜻밖의 손님 하나가 그 여름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의 부임 첫해에 그룹 차원의 회장 지시를 받고 법인 폐쇄를 위해 조사를 나왔던 팀장이었다. 결국 폐쇄가 아니라 오히려 법인이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준 그룹 기획실의 남 팀장, 그는 나와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한국에 돌아가서도 가끔 안부를 전하며 우리는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자회사에 근무하는 나를 위해 그룹 차원의 고급 정보를 들려주기도 하고 인사와 경영에 관련해서도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가 무슨 영문인지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말은 다른 일로 미국 출장 온 김에 잠깐 짬을 내어 들렀다고 했지만 나에게 긴히 들려줄 말이 있는 게 확실했다. 그리고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요즘, 그룹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자회사에서 관리하는 미국 법인을 그룹 차원에서 관리하려고 한다는 거야. 그런 얘기 못 들었어?”     


“전혀, 나는 ‘금시초문今始初聞’인데!”     


“그러니까 그게, 미국 사업이 안정적으로 운영이 되다 보니까 그룹 내부에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나 봐. 그룹에서 사업에 관심을 가진다는 얘기는 사업을 그룹 차원으로 올려서 자기들이 원하는 사람을 보낼 수 있다는 얘기지. 혹시 이럴 수도 있어. 그룹 내에 어떤 놈이 자기가 미국 오고 싶어서 작업하고 있는지도 몰라. 아무튼 소문이 그래. 그러니까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라는 말이야. 자칫 문제라도 일으키면 자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사실 나도 완전히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 자리가 언제까지나 나의 자리일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좋은 자리라고 소문이 나면 언제나 경쟁자는 모여들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를 믿어 주는 김주환 사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김주환 사장이나 나도 결국은 그룹에서 파견 나온 직원 아닌가? 아무리 그룹 내 대표이사가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장의 의견을 무시한 채 함부로 조직을 여기에 붙였다 저기에 붙였다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찝찝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업무가 그룹 차원으로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한꺼번에 나와 진화식 모두를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진화식은 벌써 8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 어떤 상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법인장인 나를 쉽게 교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남 팀장이 여전히 걱정 어린 눈빛으로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첫해 감사 때 나랑 동행했던 감사실에 이철진 차장 있잖아? 그 친구가 미국 다녀간 이후로 미국 법인에 엄청나게 관심이 많았어. 그리고 그 친구 올해 승진한 거 모르지? 그 친구가 승진해서 지금 그룹 컨설팅부로 갔어. 거기서 미국 법인을 그룹으로 가져오는 일을 추진하나 봐. 그 자식 아무래도 하는 짓이 이상해. 그놈은 감사반에서도 아주 교활하기로 소문이 났었어. 감사받을 때 그놈한테 걸린 사람들은 아주 곡소리가 났으니까 말이야.”     


그렇다. 이철진, 2년 전 감사를 마치기 바로 전날 가벼운 술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를 놀리며 “간첩 이철진”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두꺼운 안경 너머 교활한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의미 없는 술은 마시지 않는다며 저녁 시간 내내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왠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불길함에 젖어있는 내 마음에 불을 지피듯 남 팀장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그놈 학벌도 좋고 그룹 내에서 인맥도 빵빵한 편이야. 그놈이 아무래도 대표이사님을 구슬려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 같아. 대표이사님이랑 그놈이 같은 고향 출신이래. 하여간 여러 가지로 낌새가 안 좋아. 그놈이 혹시 미국 법인으로 온다면 절대 주재원으로 올 놈은 아니야. 승진까지 한 마당에 무조건 법인장으로 오려고 할 거야. 아무튼 조심해.”     


걱정 어린 눈빛만을 남긴 채 남 팀장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자회사의 김주환 사장과 송필연 국장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실지로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때로는 자회사도 모르게 그룹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기도 한다. 그리고 남 팀장은 그런 그룹의 가장 핵심부에 있는 사람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내가 이 법인을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가?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리기 위해 정부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신제품 생산을 시작한 나다.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려 악순환에 허덕이던 회사를 이제 겨우 선순환의 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진화식도 아니고 설마 그런 나를? 최고의 경영 실적과 대외적인 마케팅 성공에도 승진에서 탈락시킨 나를? 그들이 사람이라면 절대 그럴 순 없을 것이야.’     


나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남 팀장이 떠나기 전 올해의 사자성어라며 나에게 선물처럼 던졌던 단어가 떠올랐다.      


“해불양수 海不讓水” “넓은 바다는 강물을 물리치지 않는다.”      


‘그래, 올 테면 와라. 정의가 살아있다면 그럴 순 없으리라. 설령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그 또한 받으리라. 마치 넓은 바다가 강물을 물리치지 않듯이 나 또한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으리라. 하지만 교활한 미꾸라지 새끼 하나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면 내 이놈을 잡아 반드시 모가지를 치리라.’     


한국으로 떠난 남 팀장의 걱정 어린 눈빛이 기억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한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법인장님, 안녕하셨어요? 혹시 저 기억하시겠어요? 저 이철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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