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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링 Sep 16. 2024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공리냐 vs 공멸이냐

“우주 보라돌이는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

1. 용사 타노스의 모험


영화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우주 보라돌이의 위대한 여정에 함께 합니다. 자원 고갈로 멸망 직전에 놓인 우주는 침몰하는 배와 다름 없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용사 타노스는 5개의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야 하죠.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성가신 악의 무리,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어벤져스(복수자들)! 사사건건 앞길을 막아서는 어벤져스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타노스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클라이맥스에 이릅니다. 타노스는 전기를 남발하는 이세계 피카츄, 토르에게 도끼로 가슴을 내려찍히는 끔찍한 부상을 입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인피니티 스톤들을 이용하여 손가락을 튕김으로써 끝끝내 성스러운 과업을 완수해냅니다. 그야말로 "의지의 승리"입니다[1]. 이상, 타노스의 입장에서 작성한 그의 여로입니다.


타노스가 이루고자 마음먹은 과업은 ‘우주 생명체 절반의 소멸’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자원고갈로 생명을 다해가는 우주를 회복하고, 나아가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임을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타노스 선택의 딜레마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공멸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 vs 설사 공멸할지라도 생명의 보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타노스의 선택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우주 보라돌이의 선택은 생각보다 많은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스틸 컷, 네이버 제공)


2. 뜨거운 가슴, 차가운 머리의 현자 타노스


타노스가 생명체의 절반을 소멸시킨 선택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는 영국의 목사이자 경제학자 맬서스의 이론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맬서스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인구증가율이 토지생산 증가율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에” 인구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 나아가 그는 인구증가를 막기 위해, 빈민구제를 위해 제정된 구빈법의 폐지를 주장했고, 부부관계에 있어 “엄격하게 순결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으며[3], “빈민들에게 청결을 강조하는 대신 불결함에 익숙해지도록 선전”하고, “전염병 치료약이 사용되는 것을 막아” 연간 사망률을 높임으로써, 결과적으로 굶어 죽는 사람을 막을 수 있다는(???) 휴머니즘 가득한 주장에 이릅니다[4]. 지금이야 터무니 없는 극단주의자의 외침으로 들리겠지만, 맬서스의 저서가 출간될 당시에는 사회 지도층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일부는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는’ 타노스는 영화에서 마치 현자처럼 묘사됩니다. 저는 여기서 흡사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이상적인 지도자로 추구한, 철학에 조예가 깊은 철인(哲人) 왕을 떠올렸습니다. 플라톤이 찬양하는 철인 왕은 합리적이고 공평무사한 자입니다. 결코 사리사욕이나 친소관계에 얽매여서는 안 되죠. 이런 관점에서 플라톤은 지도자 계급에 대한 ‘처자 공유제’ 아이디어를 조심스럽게 주장합니다. “수호자 부류의 모든 여자를 같은 부류의 모든 남자가 공유하고, 어떤 여자도 개인적으로 남자와 함께 살지 못하게”하고, “자식도 공유하여 부모가 자기 자식을 알지 못하게 하고, 자녀도 자기 부모를 모르게” 해야 한다고 말이죠[5]. 플라톤도 저서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지는 최대 논쟁거리가 될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무릇 지도자라면 혈육의 사사로운 정을 초월하여 오로지 국가를 위한 공공심으로 가득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플라톤이 보기에 타노스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될 미덕의 소유자일 것 같습니다. 영화의 중반쯤 타노스는 다섯 개의 인피니티 스톤 중 소울 스톤을 얻으러 보르미르 행성에 도착하고, 스톤을 얻기 위해서 사랑하는 이를 산제물로 바쳐야 함을 알게 됩니다. 타노스를 증오하는 그의 수양 딸, 가모라는 타노스 같은 소시오패스(?)에게 사랑하는 이가 있겠냐며 조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타노스는 눈물 흘리며 진심으로 가모라를 아껴왔던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가모라는 물론 관객들까지 경악시킵니다. 결국 그는 가모라를 절벽 아래로 내던짐으로써 우주를 위해서 가족마저 희생시킬 수 있다는, 범인(凡人)이라면 쉽게 하지 못할 결단을 내립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와, 독하다 독해.’ 느낌과 동시에, 대의를 위한 그의 행동이 최소한 진정성은 담보하고 있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영화의 종반, 과업을 끝마친 이후 타노스의 모습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는 인피니트 스톤의 강력한 힘을 이용해 우주를 지배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 힘만 있다면 사랑하는 딸 가모라를 되살릴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죠(심지어 후속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인피니트 스톤이 쓰임을 다했다며 소멸시켜 버립니다). 그는 작은 행성에 은거하며 농사 짓고 살게 되는데, 그늘진 오두막에서 밖으로 나와 태양을 바라보는 타노스의 모습이 연출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플라톤이 서술한 ‘동굴의 우화’를 떠올렸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굴 안에 죄수들이 갇혀 있다. 죄수들은 사슬로 몸이 고정되어 오직 눈앞의 동굴 벽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죄수들의 등 뒤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사람들이 그림자 놀이를 하고 있다. 죄수들은 동굴 벽면에 투영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실제 세계의 전부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 한 죄수가 풀려나 동굴 밖으로 나간다. 그는 동굴 밖에서 환하게 빛나는 태양을 마주하고, 태양빛 아래 색색깔로 빛나는 진짜 세상을 접하며, 여태껏 보아온 그림자는 실제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깨닫는다. 다시 동굴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본 진실을 죄수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이를 믿지 못한 죄수들은 그를 비웃고, 심지어 죽이려 든다[6].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 출처: Wikipedia)


플라톤은 위 우화를 통해 우리가 보는 세계는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동굴 밖에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에 해당하는 불변의 이데아를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타노스는 자신의 고향인 타이탄 행성의 사람들에게 행성의 멸망이라는 미래를 예견하며 인구의 절반을 제거하자고 제안했으나, 고향 사람들(동굴 안에 묶인 죄수)은 그를 미치광이라며 조롱하고 추방해버립니다. 결국 타이탄 행성은 자원 고갈로 멸망하고 폐허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관점에서 타노스는 동굴을 벗어나 본질을 바라본 현자인 것이죠. ‘동굴 밖을 나와 태양을 목도한 죄수’의 모습과 어두운 오두막에서 나와 태양을 바라보는 타노스가 오버랩되는 듯한 인상을 받은 건 저만의 착각일까요?


3. 무엇이 타노스를 폭주 기관차로 만들었나


그렇다면 현자 타노스의 선택에서 어떤 철학적 배경을 엿볼 수 있을까요?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효용)를 극대화하는 행위가 옳다는 공리주의를 주창하였습니다. 선택의 순간, 공리주의는 각 선택에 따른 이해득실의 총량을 계산하고, 그 결과에 따라 공공의 이익이 더 큰 쪽을 택하면 됩니다. 심지어 벤담은 자신이 죽고난 후 시신을 해부용으로 기증하는 것보다, 위대한 철학자의 육체를 보존하고 전시함으로써 후세에 자극을 주는 편이 공리가 더 클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지금껏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남아 있습니다[7]. 공리주의적으로 타노스는 다음과 같이 계산한 것입니다.


선택1: 우주를 이대로 방치하면 모두 나락으로 간다. (- 100%)

선택2: 절반을 줄이면 공존하며 살 수 있다. (- 50%)


둘을 비교하면 마이너스 50 퍼센트에 불과한 선택2로 저울추가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타노스는 냉정하게 계산 결과에 따른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저런 선택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자원의 배분의 문제를 넘어, 생명 문제로 비화될 경우 선택은 한층 난해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사례로 ‘트롤리 딜레마’가 있습니다.


당신은 전차 기관사다. 전차는 질주하고 있는데, 브레이크가 고장났다. 안타깝게도 저 앞 철로에는 이를 모르는 작업자 5명이 일하는 중이다. 이때 당신은 철로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대신 다른 철로에는 작업자 1명이 일하고 있다. 당신은 철로를 바꾸겠는가?

(트롤리 딜레마, 출처: Wikipedia)

제레미 벤담의 주장대로 공리주의가 ‘도덕과 입법의 기초’ 그 자체라면, 위 문제의 정답은 간단합니다. 당연히 선로를 바꿔야겠지요.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본인이 어떠한 법적인 책임, 도덕적 비난을 짊어지지 않는다고 전제할지라도, 선뜻 소수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선로를 바꿔서 사망한 작업자가 매일 밤 꿈에 나오는 건 썩 유쾌한 경험 같지 않습니다.


4. 타노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렇다면 웬만해선 철로를 쉽게 바꾸지 않을 것 같은 철학적 사상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자유주의자라면 타노스의 선택을 앞두고 어떡할까요? 다수의 목숨이 경각에 매달렸다는 이유로 개인으로 하여금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생명’(살아있어야 자유를 누리든 말든 하죠!)을 내버리라고 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하지 못할 겁니다. 한 마디로 자유주의자라면 타노스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어이 보라돌이, 우주를 살리려는 네 마음은 잘 알겠어. 그런데 그렇다고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아무 잘못 없는 개인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침해하는 거 아냐!”



한편, 이번에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타노스의 선택에 반대하는 입장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공동체주의입니다.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오늘날 이 입장을 대표합니다. 공동체주의자는 공동체의 번영과 존속을 최우선가치로 두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이 지녀야 할 ‘미덕’을 중시합니다. 미덕은 시대에 따라 불변하는 경우도,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은 과거에는 최고의 미덕이었지만, 오늘날 이를 굳이 지켜가고 싶다면 북한이라도 가는 게 나을 성싶습니다. 이에 반하여 ‘친구 간의 우정’, ‘가족 간의 사랑’같은 가치는 지극히 냉소적인 인사가 아닌 한, 불변하는 공동체의 미덕임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 미덕의 특성 때문에, 공동체주의는 오늘날의 미덕이란 무엇인지, 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토론하고자 합니다(이런 맥락에서 마이클 샌델이 2012년 연세대학교에서 강연했을 때, 일방향적인 교실이 아니라 모두가 토론에 참여하는 양방향적인 노천극장을 택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주의에서 ‘자유’ 또한 지켜야 할 소중한 미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부분에서 ‘자유’를 최상위 가치로 간주하는 자유주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공동체주의자라면 타노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이보게 보라돌이, 공동체가 살아남는 게 중요한 건 맞아. 그런데 아무리 공동체를 살린다고 할지라도 죄 없는 사람 절반의 생명을 거리낌 없이 포기하는 사회에서 더 살고 싶어하는 구성원이 있을까? 그런 공동체가 얼마나 오래 갈까?”


타노스는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 만약 너희끼리 희생자를 제비뽑기라도 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면, 사람들은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갔을 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내가 홀로 결정을 내렸고, 모든 책임을 짊어진 거 아니겠나!”


이에 공동체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응할 겁니다.


“우리는 힘을 가진 누군가가 대의를 운운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사랑하는 가족, 친구, 동료들의 목숨을 한순간에 뺏어갈 수 있는 그런 공동체에서 불안에 떨면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타노스의 선택이 과학적 근거에 기반하여 객관적으로 내려진 것인지도 의심해야 합니다. 정말 생명체 절반을 소멸시키면 우주가 되살아날까요? 그러면 자원 고갈의 위기는 영원히 종식된 건가요? 그런데 굳이 절반씩이나 없애야 하나요? 타노스는 자신의 고향 타이탄 행성이 자기 말을 안 듣다가 멸망했고, 가모라의 행성이 절반을 죽이고 나서 풍요로워졌음을 사례로 듭니다. 그런데 온 우주의 생명체 절반을 소멸시키기 위한 근거로는 너무 빈약한 거 아닌가요?


‘절반을 안 죽이니까 타이탄은 멸망했어.’ → ‘그러니까 우주도 멸망할 거야!’

‘절반을 죽이니까 가모라의 행성이 살아났어.’ → ‘그러니까 우주도 살아날 거야!’


논리학에서 말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사례를 근거로 엄청난 결론을 내렸군요. 타노스 곁에 뛰어난 과학자들이 다수 포진해서 수년의 연구 끝에 ‘생명체 절반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10,000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어도 모자랄 판에, 타노스는 그저 “타이탄이 그랬었단 말야...”하면서 ‘타무새’ 같은 모습을 보일 따름입니다[8].


4. 무덤 밖을 나온 맬서스


2024. 8. 29. 대한민국 첫 기후소송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왔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탄소중립기본법 등이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에 관하여 2031년부터 2049년까지 어떠한 규정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헌법에 위반하여 청구인들의 환경권을 침해하였음을 인정하였습니다[9]. 기후위기가 점점 가시화되어감에 따라, 기후소송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요즘 들어 9월이 왔는데도 최고기온이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지속되는 ‘가을 실종’ 현상도 우리를 힘들게 만들고 있죠[10]. 사업가에서 은퇴한 빌 게이츠는 활동가로 변신하여 ‘2050년까지 탄소배출을 제로(0) 수준으로 만들지 않으면 인류는 위기에 처한다’고 경고한바 있습니다[11]. 사회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지구상의 생물 종 50% 이상이 향후 80년 이내에 멸종할 위기에 처했으며[12]’, ‘지구온난화로 지표면 아래 기반이 가열되어 변형되고 있으며 건물, 수도·가스 파이프라인, 전력시설, 지하철 등 지하 인프라가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는[13]’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알리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인구 폭증에 따른 식량 부족을 역설한 맬서스의 주장은 오늘날에는 유효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최근 기후위기를 보면 맬서스의 이론이 변용될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며 1인당 에너지 사용량과 폐기물 배출량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지구 행성의 온실가스 처리 능력과 생태계 재생 능력은 일정하게 유지되거나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14]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타노스의 선택과 유사한 기로에 서있는지도 모릅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세계적인 재앙에 대하여 수많은 과학자와 활동가들이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상현상은 감지되고 있고, 큰 결단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지만, 당장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한, 문제가 해결되기 위한 충분한 노력이 진행될지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는 타노스처럼 손가락을 튕겨서 생명체 절반을 날려버리는 방법을 택하기는 어렵습니다(언젠가는 “타노스가 옳았어...”라고 중얼거리는 날이 오게 될까요?). 그 방법 말고는 공멸 밖에 없다는 명백한 관측이 있을지라도, 손가락을 튕긴 제가 제정신으로 살아가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타노스 같은 누군가가 대신 그 선택을 해주었으면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피해자로 남는 게 마음 편한 길일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우주를 구원한다는 목적 아래 맹목적으로 달려간 타노스. 그의 여정과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 보여준 그의 청신한 행보에는 비범하면서도 어떠한 종류의 숭고미까지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마블 영화 전성기의 한 축을 이끈 매력적인 악역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이 타노스라면 손가락을 튕기는 선택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트롤리 딜레마의 기관사라면 철로를 변경할 건가요?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킨 개인적인 경험이 있으신가요?




각주

[1] 레니 리펜슈탈 감독, 영화 <<의지의 승리>>, 1935, 독일 나치당의 선전 영화이다.

[2] 맬서스, <<인구론>>, 이서행 옮김, 동서문화사, 2016, 22쪽

[3] 같은 책, 457쪽

[4] 같은 책, 473쪽

[5] 플라톤, <<국가>>,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2023, 239쪽

[6] 같은 책, 334쪽~338쪽

[7]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와이즈베리, 2014, 92쪽~93쪽

[8] “타이탄 앵무새”: 인터넷에서 일종의 비하어로, '앵'을 떼고 '무새'만 접미사처럼 사용된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논리와 상관없이 마치 앵무새처럼 한 가지 단어나 논리만을 말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이며, '○무새'라고 부르는 식이다(나무위키, “앵무새(동음이의어)” 검색 결과)

[9] 헌법재판소 2024. 8. 29. 선고 2020헌마389 결정

[10] 정혜윤, 「서울, 85년 만 9월 더위...내일~모레 ‘더 덥다’」, YTN, 2024. 9. 9.

[11]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김민주·이엽 옮김, 김영사, 2021, 280쪽

[12] 제러미 리프킨, <<플래닛 아쿠아>>, 안진환 옮김, 민음사, 2024, 12쪽

[13] 같은 책, 20쪽

[14] 유시민, <<청춘의 독서>>, 웅진지식하우스, 2009,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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