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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링 Sep 09. 2024

<횡단보도 위의 노약자> 도울까 vs 내버려 둘까

"빨간 불 직전에 건너기 시작한 노인을 도울 필요는 없을까?"

평소 선행에 관해서,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일단 해라.”라는 주의입니다. 도움이 정말 필요한 상황인지, 괜한 오지랖 부리는 게 아닌지 이것저것 따져보다 지나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후회로 남기도 했었고, 결과적으로 도움 받은 사람들은 대개 고마워하는 것 같아, 통계적으로(?) 일단 돕는 방향이 낫겠다 결론 내렸습니다. 기껏 도왔는데 괜한 오지랖이었다고 판명되면 저 하나 면상 팔리고 넘어가면 될 일이니까요. 그런데 올해 7월의 여름날 사건은 저를 머리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1. 사건이 발생하다

일일 연수를 신청하여 들으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왕복 9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꽤 긴 횡단보도를 건널 때였습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파란 불로 바뀐 줄도 모르고 있다 뒤늦게 알아채고 헐레벌떡 뛰어서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횡단보도 끝에 다다를 때쯤 맞은 편에서 한쪽 발에 목발을 짚은 할아버지가 절뚝거리며 건너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신호등의 잔여시간 표시장치를 흘긋 쳐다봤습니다. 파란 불은 고작 두 칸 정도 남아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노인은 분명 몇 걸음 못가 빨간 불로 변한 긴 횡단보도 위에 홀로 남겨질 겁니다. 차량통행도 많은 구간이라 위험할 것이 뻔했습니다. 잠깐의 고민 후 저는 그를 돕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선택을 내렸습니다. 마음이 불편해 고개가 절로 뒤로 돌아갔습니다. 예상대로 곧 빨간 불이 빛났고, 차들은 노인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으며, 노인은 절뚝거리면서도 한 걸음씩 위태로운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노인이 횡단보도의 3/4쯤 이르렀을 때, 건너편에서 걱정스레 지켜보던 여성 분이 다가가 부축해서 데려갔습니다.


제 선택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횡단보도 신호 간격이 긴 편인데 연수시간에 늦은 나머지 마음이 급했기 때문에? 가만 있어도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는 무더운 날씨여서? 노인을 도와주는 와중에 내 신체까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니까? 이런 이유들도 선택의 약소한 지분을 차지하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숙고 끝에, 선택의 순간 제 마음의 소리는 다음과 같이 양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후자(쿼카링 파스텔블루)를 선택했죠.


쿼카링 버건디: “이봐 쿼카링, 노인이라구. 심지어 다리도 절고 있는걸? 빨리 가서 안 돕고 뭐하는 거야?”

쿼카링 파스텔블루: “아니야 쿼카링, 내가 봤을 때 저 노인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냐. 평소에도 늘 저렇게 살 거라고. 본인도 다 알고 초래한 결과인데 그렇게까지 신경 써줄 것 없어.”


만약 노인이 횡단보도를 적절한 시간에 건너기 시작했음에도 다리가 불편해 도저히 제 시간에 못 건너는 상황이었다면, 저는 분명 다른 이유들은 신경 쓰지 않고 도우러 갔을 것입니다. 결국 저는 그 상황을 초래한 노인이 전적으로 책임질 일이라고 판단한 결과, 돕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문제가 있었고(왜 안 도와줬지?), 해결했습니다(그의 책임이거든!). 그런데 마음 속 찜찜한 감정은 여전히 묵직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좀 더 생각해본 후, 저는 사회적 약자 보호 vs 개인의 책임 사이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고민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선택에서 제가 사갈시하는 언행의 일단을 엿본 듯한 의구심이 든 나머지 꺼림칙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2. 청소노동자가 된 건 오로지 본인 책임일까?

2022년 연세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집회를 열었습니다. 일부 학생이 수업권이 침해당하였다고 주장하며 청소노동자를 업무방해 등 혐의로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고, 나아가 청소노동자들을 상대로 수업권 침해에 따른 약 638만 원의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학생들은 노동자들이 시위를 시작한 4월 6일부터 소음을 줄이기 전까지를 전체 등록금에서 일할 계산해 수업권 침해 금액을 책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소음으로 학생회관에서 공부를 하지 못한 금액’, ‘미래에 겪을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고려해 계산한 정신적 손해배상금액’ 및 ‘노조의 시위로 정신건강이 악화되어 발생한 우울증, 공황장애 등에 대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비’가 포함되었습니다[1].


당시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에브리타임’에는 청소노동자들을 비난하는 댓글들이 올라왔는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대우가 불만이면 다른 데서 일하면 되지 않아? 오로지 학교 노동 밖에 일자리가 없나? 그걸 선택한다는 게 결국 자기 입장에서 베스트인 선택지라는 거 아냐?”

“일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임금이 맘에 안 들면 다른 거 해라.” [2]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청소노동자라는 직업은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이므로, 그에 대한 책임에 해당하는 낮은 수준의 임금과 처우도 본인이 짊어질 책임이다.’라는 논리가 전제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제 선택이 위 댓글들과 같은 견지에서 ‘노인이 횡단보도를 무리하게 건넌 것은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이고, 그에 따라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도 본인의 책임이다.’라고 가볍게 판단한 것은 아닐지 고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이 선택을 하게 만드는 자유란 무엇일까요?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의 영역을 ① 내면적으로 양심, 생각, 감정을 누릴 자유, ② 각자 개성에 따라 자기 삶을 설계하고 그대로 살아갈 자유, ③ 어떠한 목적의 모임에 대한 결사의 자유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다만, 이러한 자유는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라는 유명한 ‘해악의 원칙’에 의한 제한을 받는다고 천명합니다[3]. 즉, 개인의 자유는 보장받되,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해악을 끼치는 경우에 이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횡단보도 위 노인의 행동은 자신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자유를 실현한 것입니다. 다만, 이로 인해 다른 이의 자유를 침해하였는지는 애매합니다. 비록 자동차의 통행을 방해하기는 했지만, 바닥에 드러누워 진입을 못하게 만든 것도 아닌데 이로써 해악을 저질렀다고 단언하기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감이 있습니다(다소 민폐이긴 하지만요!). 물론 노인의 행동이 윤리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럴 때 써먹기 좋은 방법이 칸트의 정언명령인데, “나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의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행위하라.”입니다. 간단히 말해, 보편적으로 모든 이가 그렇게 행동해도 괜찮을 때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 모든 사람이 빨간 불이 되기 직전 신호등을 건너기 시작한다면, 차들의 통행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고,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어려울 겁니다. 


3.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치면 언제나 감옥에 갇힐까?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법은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요? 단순히 처벌 여부를 떠나서 법은 우리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간에 맺은 약속과 같은 것이므로, 이를 통해 공동체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습니다.


도로교통법 제27조(보행자의 보호) 제1항은, “모든 차 또는 노면전차의 운전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거나 통행하려고 하는 때에는 보행자의 횡단을 방해하거나 위험을 주지 아니하도록 그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정지하여야 한다.”라고 보행자에 대한 보호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제3조(처벌의 특례) 제1항은 “차의 운전자가 교통사고로 인하여 형법 제268조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여 교통사고로 인한 범죄를 더 중하게 처벌하며, 동법 동조 제2항 제6호는 12대 중과실 중 하나로, “도로교통법 제27조 제1항에 따른 횡단보도에서의 보행자 보호의무를 위반하여 운전한 경우”를 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운전자의 주의의무를 강화하여 횡단보도를 통행하는 보행자의 생명, 신체의 안전을 두텁게 보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대법원 2009. 5. 14. 선고 2007도9598 판결).


한편, 신호등의 파란 불이 깜박이는 중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 보행자가 자동차에 충돌한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례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 파란 불이 점멸 중, 아직 빨간 불이 되기 전에 충돌한 경우: 도로교통법상 보행자 보호의무의 대상이 된다(대법원 2009. 5. 14. 선고 2007도9598 판결).

② 점멸 중인 파란 불이 빨간 불로 바뀐 후에 충돌한 경우: 

    ⒜ 피해자는 신호기가 설치된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의 점멸신호를 위반하여 횡단보도를 통행하였기 때문에[4], 횡단보도를 통행 중인 보행자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보행자 보호의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대법원 2001. 10. 9. 선고 2001도2939 판결).

    ⒝ 다만, 보행자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뀔 무렵 횡단보도를 통과하는 자동차 운전자는 보행자가 교통신호를 철저히 준수할 것이라는 신뢰만으로 운전할 것이 아니라, 좌우에서 이미 횡단보도에 진입한 보행자가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는 등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어느 때라도 정지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자동차를 운전해야 할 업무상의 주의의무가 있다(대법원 1986. 5. 27. 선고 86도549 판결).


즉, 판례는 파란 불이 깜박이는 중에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 보행자가 빨간 불이 되기 전 차에 치인 경우에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12대 중과실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반면, 빨간 불로 바뀐 이후 차에 치이면 12대 중과실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으로 봅니다(12대 중과실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경미한 사고인 경우 운전자는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자동차 종합보험에 가입함으로써 처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법령과 판례에 따를 때, 노인이 만약 차에 충돌함으로써 상해를 입었다고 가정하면, 중대한 피해를 입었는지 여부에 따라 운전자가 처벌받을 것인 것 아닌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운전자에게 횡단보도 위의 보행자에 대한 보호의무가 있다고 보지만, 횡단보도를 너무 늦게 건넌 사람에게는 경미한 부상까지는 일정 부분 감수할 것을 요구하며, 중상해를 입은 경우까지 전적으로 책임지라고 강요하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됩니다(물론 제가 검토한 것은 형사책임이고, 민사책임은 별개이기 때문에 운전자는 경미한 부상을 입은 노인에게 과실비율을 계산하여 치료비 등의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위 사례를 검토하면서 든 생각은, 파란 불이 되자마자 발걸음을 뗐으나 도저히 제 시간에 건너지 못하는 노약자가 차에 치여 경미한 부상을 입은 경우에도 보행자로서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는 점이 마음 아팠습니다. 


4. 의인과 나

2001년 1월 일본 도쿄 지하철 신오쿠보역에서 술에 취한 승객 한 명이 선로에 추락하였습니다. 26세 유학생 이수현과 일본인 세키네 시로는 취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으나, 제때 속도를 줄이지 못한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전원 사망하였습니다. 이수현은 일본에서 ‘한국인 의인’으로 불리며 그에 대한 추모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5]. 그는 '그건 술에 취해 실족한 당신 책임이잖아'라며 취객을 방치하지는 않기로 선택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사회적 약자인 노인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울까요? 본인이 초래한 결과이므로 내버려둘까요? 고민해 본 결과, 현재의 저는 그 여름날보다는 조금 더 망설일 것 같습니다. 본인 책임에 따른 결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은 제가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가치와도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저런 상황에서까지 도와주는 게 맞나?’싶은 마음이 6:4 정도로 우세한 것 같습니다(사건 당시에는 8:2 였습니다). 의인 이수현이라면 망설임 없이 도울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의인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지는 않나 봅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영글어서 제 생각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로마 공화정의 철학자 키케로도 과거와 현재의 말이 다르다는 비판에 “나는 하루하루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 달리 나를 자유인으로 남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푸념했다죠[6]. 몇 년 후 이 글을 돌아보면 저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이라면 노인을 돕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시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줘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으신가요?

가장 최근에 누군가를 도운 경험은 무엇인가요?




참고 자료

[1] 양한주, 「연세대생 3명 “집회 청소노동자, 638만원 배상” 소송」, <<국민일보>>, 2022. 6. 28.

[2] 나임윤경, <<공정감각>>, 문예출판사

[3]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4]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제6조 제2항 별표2에 따르면, 녹색 등화 점멸의 의미에 대하여 “보행자는 횡단을 시작하여서는 아니 되고, 횡단하고 있는 보행자는 신속하게 횡단을 완료하거나 그 횡단을 중지하고 보도로 되돌아와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5] 김진아, 「일본에서 21년째 잊지 못하는 그 이름...의인 ‘이수현’」, <<서울신문>>, 2022. 1. 26.

[6] 라이언 홀리데이·스티븐 핸슬먼, <<데일리 필로소피>>,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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