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그룹에 끼기 위해 오랜 친구를 손절해도 괜찮을까?”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2>는 사춘기를 거치는 ‘라일리’와 머릿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의인화된 감정들에게 발생하는 좌충우돌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불안이의 쿠데타(?)에 저항하고 이를 관대하게 포용하는 기쁨이의 리더십이 인상깊었습니다만, 오늘의 주제는 라일리의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공하면 혁명!" (인사이드아웃2 스틸컷, 네이버 제공)
전작에 비해 성장한 라일리는 중학교 하키 대표로서 친구들인 ‘그레이스’, ‘브리’와 함께 대회에 나가 멋지게 우승합니다. 발군의 역량을 보여준 라일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경기를 관전하러 온 코치님으로부터 하키 캠프에 초대받습니다. 라일리는 캠프에서 코치님께 좋은 평가를 받아 고교 최고의 하키팀인 ‘파이어호크’의 일원으로 선발될 꿈에 부풉니다. 그런데 캠프 당일, 라일리는 우연히 파이어호크의 팀 리더 ‘밸’의 눈에 들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모든 참가인원들은 캠프 기간 동안 두 팀으로 나뉘어 훈련합니다. 라일리는 고민합니다. 이제는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갈라지게 될 친구들과 한 팀에서 중학교 시절 마지막 경기를 장식할지, 밸의 제안에 따라 파이어호크 팀에 들어가 코치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것인지 말입니다. 라일리의 감정들의 경우, 기쁨이는 친구들 팀을, 불안이는 파이어호크 팀을 각자 지지합니다. 결국 라일리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밸이 있는 파이어호크 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여기서부터 온갖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라일리의 딜레마를 단순화하면 “우정 vs 성공”에 대한 선택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독자 분이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 같나요? “당연히 우정 아냐?”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사춘기를 되돌아보며 라일리의 감정에 이입해보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잘 나가는 그룹에서 함께 놀고 싶은 욕망, 거기에 끼지 못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지 않았나요?
뇌과학에 따르면, 두개골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뇌는 원시수렵사회에 최적화되어 사고한다고 합니다. 인류는 역사의 99.8%를 구석기시대에서 살았습니다[1]. 일반적인 동물들에 비해 인간은 태어난 후에도 자립하기까지 오랜 기간 부모의 돌봄이 필요하고, 몸을 따뜻하게 보호해 줄 거친 털이나 먹잇감을 사냥할 날카로운 이빨이나 손발톱이 없습니다. 나약한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집단 생활이 불가피했습니다. 자연 속에 홀로 내던져진 인간을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며, 부족집단에의 소속은 생존문제와 직결되었습니다. 물론 라일리가 파이어호크 팀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사망하지는 않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우리 라일리의 뇌가 끊임없이 자극하는 근원적인 공포를 극복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본능에 맞서는 “우정”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우정은 수단이 아닌 목적입니다. 수단이라 함은 다른 무엇을 위한 도구로 삼는다는 것이고, 목적은 다른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친구와 우정을 쌓음으로써 돈을 벌거나 높은 지위를 획득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런 이유를 가지고 교분을 쌓는다면, 이를 두고 우리는 우정이라고 부르지 않죠. 우정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정은 목적이라는 점에 다들 동의하실 겁니다.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우정이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모든 사물에 관한,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라고 다소 호들갑스럽게 정의했습니다[2]. 또한 그는 우정(amicitia)이란 단어는 사랑(amor)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관계를 벗어나서 우리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호감과도 같은 것이라 보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정이란 ‘친구 사이의 깊은 애정’이라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정도 흔들릴 때가 있으며, 종종 깨지기도 합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앞서 말한 키케로는 공화주의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친구들과 함께 카이사르 장군의 쿠데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종국에는 친구들을 떠나 카이사르에게 항복하고 사면받습니다(물론 키케로가 버린 이들은 우정을 나눈 진정한 친구라기보단 정치적 동지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유명한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과 깊은 우정을 나눴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 장군은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고 태업했다는 원균의 모함을 받았고, 이 때문에 선조가 대로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왕의 눈치를 보는 뭇 신하들이 앞장서 그를 비난할 때, 류성룡은 친구를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비난 대열에 합류해버렸고, 가오 상하는(?) 모습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박제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파직되고 맙니다.
"성품이 강의(强毅)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데,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하여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正憲)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과람합니다.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하고 게을러집니다.[3]"
류성룡은 현명하고 바른 인성으로 당대에도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입니다. 하물며 고작 10대 중반을 벗어난 라일리에게 순간적으로 우정을 저버린 것을 들어 비난하는 것은 가혹할 것 같습니다. 라일리도 자신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계속 미안함과 불편한 마음으로 괴로워하거든요.
제게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학창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 모두와 어울려 놀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친구 A를 다른 친구들이 어떤 이유에선지 조금씩 멀리 했습니다. 저는 별로 개의치 않았고 계속 A와 친분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굣길에 다른 친구들이 저를 불러세우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까?
“쿼카링, 너 왜 자꾸 A랑 놀고 다니냐? 자꾸 그러면 다른 친구들이 너랑도 더 안 놀지도 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후로 A와의 관계에 소극적이 되었고, 세 마디 대화할 것을 한 마디만 하게 되고, 나중에는 제가 먼저 말을 걸지는 않게 되었으며, 이후 반이 갈라지면서 멀어져 갔습니다.
다만 라일리나 저나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봐도 좋았을 법 합니다. 우리가 가끔 하는 착각 중 하나가 세상을 흑백논리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논리학에서 흑백논리라 함은, ‘반대’관계를 ‘모순’관계로 혼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4]. ‘반대’관계는 둘 다 옳을 수는 없지만 둘 다 틀릴 수도 있는 상황임에 반해, ‘모순’관계는 하나가 참이고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일리는 선택의 순간에 우정을 지키는 것과 파이어호크 팀에 들어가는 것 중 오로지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고, 다른 하나는 버릴 수밖에 없다고 ‘모순’관계로 착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파이어호크 팀과 어울리면서 원래 친구들과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모습을 보이죠.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라일리가 캠프 기간 파이어호크 팀에서 활동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팀으로 선발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파이어호크 팀의 밸이 아니라 코치님이거든요(실제 라일리는 파이어호크 팀에 있었음에도 코치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차라리 손발이 잘 맞는 친구들과 한 팀을 먹고, 파이어호크를 상대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오히려 코치로부터 호평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A와 바로 그렇게 멀어질 것이 아니었습니다. A가 거짓이고 다른 친구들은 참인 모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오지랖 넓고, 두루 친하게 지내고 다녔던 저라면, 다른 친구들과의 화해를 주도하고 오해가 있었다면 풀어주는 식으로 발벗고 나설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쉬운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껏 후회스러운 기억으로 마음 한 편에 남아있습니다.
결국 라일리는 친구들에게 사과하고, 우정도 유지하면서 고등학교 진학 후 파이어호크 팀으로 선발되는 것으로 보입니다(영화에서 결과를 정확히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류성룡도 파직된 이순신과 이후에도 평생 교분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 있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 중에 그 자체로 기쁨과 충실감, 만족감을 주는 것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수단은 결국 다른 무엇을 위한 중간단계에 불과하며, 쉽게 대체 가능함에 반해, 목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이러한 가치는 얻어내기 어렵지만, 그만큼 돌아오는 반대급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순간의 이익을 위해 우정을 배신하는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 아닐까요?
여러분은 라일리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나요?
우정이냐 성공이냐를 두고 고민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우정을 나눈 친구가 있는지요?
참고 자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석기시대”
[2]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천병희 옮김, 숲
[3] 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 1월 27일 무오 1번째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 최훈, <<반박의 기술>>, 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