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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Nov 18. 2024

가을의 끝자락을 밟았다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가을걷이 덜 끝난 밭에 나가 설렁설렁 걸었다. 매서운 바람을 막아낼 두툼한 겨울 외투를 입었다. 그래도 추웠다. 어제는 에어컨을 틀었는데 오늘은 겨울이 확실하다.


가을이 푹 익었다. 하얀 분이 뽀얗게 앉은 맷돌 호박을 수확했다. 언제 수확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냥 주말이고 쉬는 날이고 날이 추워져서 가지를 잘랐다. 내가 자른 것은 아니고 농부 아빠가 두툼한 가지를 자르는 가위를 가지고 가 무심하게 툭툭 끊어 놓았다.커다란 맷돌 호박은 힘들여 키운 것이 아니다. 넓적한 호박잎과 가지 사이에서 무심한 사람의 관심을 받으며 저 혼자 저절로 컸다. 가을 늦추위까지 이겨낸 호박은 껍질이 얼마나 단단한지 돌덩이 저리 가라고 한다.


가을의 끝에서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우리의 밭에 섰다. 어수선한 밭은 아직 거두미가 덜 끝났다. 오늘 고춧대를 잘랐다.


생강 캐고 난 후 생강 줄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쟁쟁한 초록 잎에서 연두 그리고 노랑으로 다시 황토로 흙의 색깔로 돌아가는 생강의 한 해 살이가 파노라마처럼 빈 밭에 지나가는 것 같다. 생생하던 생강 줄기는 뿌리를 잃고 밭에 누웠다. 바람을 맞고 서리를 맞고 비를 맞으며 자연의 힘으로 자연의 모습으로 자연으로 돌아간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이치는 언제 봐도 신기하다.


들깨의 빈 대도 한 곳에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들깨 털고 돌아보지 않아도 수북한 존재감은 어딜 가지 않았다. 간혹 거센 바람에 떠밀려 하나 둘 시멘트 마당에 휙 날아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기도 했다. 빈 대는 가볍다. 톡 부러질 정도로 메말랐다.


들깨를 품었던 빈 들깨 주머니는 따사로운 태양 볕과 거센 풍화 작용에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드라이플라워, 가을은 천연 프리저브드를 선보인다. 가을의 들깨 꽃을 흔들면 나뭇가지 스치는 가을의 소리가 난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소리가 난다. 곧 떨어질 낙엽의 불안한 모습이 아니다. 메마른 빈 줄기에 꿋꿋하게 매달린 방울 종 같다. 수수한 그 애 모습에 반할 것 같다. 그 애의 색감은 편안하다. 들깨 종소리가 바스락거리며 가을의 끝을 잔잔하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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