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 Jun 07. 2024

센 언니 배틀

msmg

억울하다, 억울해. 나 더러 '센 언니'라고 하다니!


지난 봄, 내가 참여하는 NGO 워크숍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처럼 이 워크숍에 참가한 A는 지난해 우리 단체와 협업을 맺은 모 기업의 대표. 작년 여름 우리 단체의 회원이 되었고 지금은 나와 함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에서의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50대 초반의 A를 처음 본 작년 8월의 강렬한 인상을 뒤로하고 이제 우리는 제법 가까워진 사이.   


워크숍은 문경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열렸다.

첫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모인 우리들은 늦은 밤 회의를 이어갔다. 그러나 술과 안주가 차려진 사실상 친교의 시간. 회장님 포함 여러 명이 있던 자리였지만, 밤이 깊어지자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제법 술을 잘 마시는 몇 명이 말술 실력파 A의 말동무로서 남아있었다. 나는 술은 잘 마시지 못하지만 여자인 A를 배려했나.. 아니면 슬쩍 일어설 타이밍을 놓쳤나.. 아무튼 A랑 남자 회원 한 분만이 '끝까지 남은' 자들이 되어 그곳에 있었는데, 나도 거기에 남아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더는 졸리움을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되자 슬며시 일어나려는데, '언니, 안 돼. 언니는 나랑 더 있어줘.. '


어리광인지 술주정인지 내 엉덩이를 잡아당기면서 A가 하는 말,  

'나, 선배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정말 센 언니 포스..

내가 있잖아, 그때 작년 생태학교에서 말이야. 내가 옆 사람이랑 이야기하는데 선배가 오더니

아이 시끄러워.. 그러잖아. 얼마나 무서웠다고.. 내가 완전히 무안했잖아. '


작년 8월,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내가 그렇게 초면의 사람에게 무례할 수 있나...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는데 어쩌겠는가.  


센 언니였단다, 센 언니.  A는 이제야 이야기한다면서 덧붙이기를,

'어느 땐가는 식당에서 선배가 우리 테이블로 오더라. 내가 깜짝 놀라서 식판 들고 도망갔잖아, 하하하.. '


듣는 족족 황당한 이야기.

나,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 순하면 순했지.. 이런 소리는 처음이야, 정말. 그런데 이어진 이야기는 더욱 가관.

 

'그런데 선배가 내 휴대폰 주머니 그거, 이쁘다고 했잖아. 내가 선배한테 잘 보여야겠다 싶어서 그거라도 주면서 환심 사려고 했는데, 내가 선배 이름을 모르겠더라구. 그래서 이거 이쁘다고 하셨던 분? 그렇게 물어서 선배한테 준거야.'

무서워서 나를 피해 다니고, 내 환심을 사려고 그 빨간 실뜨기 주머니를 내게 준 거라고?


기가 막힌다. A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이랬다.

50대 초반, 전직 방송국 PD이고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한다나 뭐라나. 현재는 환경 관련 기관에서 대표로 일하는데 리서치 차원에서 우리 단체의 생테학교에 와 보는 거란다. 우리 생태학교에는 새로 관심을 갖고 참여해 줄 어른 참가자는 별로 없는 형편이어서 A와 그 동료의 등장은 더없이 반가운 일. 그래서 열열 환영은 해야 겠는데, 이거 화려한 커리어 우먼이라고 하니 살짝 주눅도 들고...

그런데, 아 뿔 싸...


처음 본 A의 모습이라니..

빨간 츄리닝 바지에 낡디 낡은 면 티셔츠 차림이었다. 3박 4일 평창에서의 일정인데 딱 동네 슈퍼에 라면 사러 나온 듯. 게다가 인상은...  

에곤 실레기 그린 인물화에서 뛰쳐나온 듯 삐죽 빼죽 짧게 자른 컷트머리는 아무렇게나 솟아있고, 작은 키에 너무너무 마른 몸. 움푹 들어간 두 빰은 딱 에곤 실레의 모델 그 자체였다. 게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담배 냄새가 진동. 으흠... 현역의 커리어 우먼... 센 언니가 나타났다... 는  생각 밖에는.  


안 그래도 후배라는데 (실력 없이 나이 든 나 같은 선배 쪽에서는 가까운 나이의 후배가 더 두려운 법이다), 내가 해보고 싶어 하던, 그러나 결코 들어가지도 못했던 방송국 물 먹은 PD였다지, 현재도 다큐멘터리 제작 활동을 하면서 어떤 기관의 대표라지... 그것 만으로도 오메 기죽어... 인데, 저 외모에서 풍기는 별 난 개성까지! 마음은 놀랬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얼른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 뿐이였었는데, 나 노력했는데...


식판을 들고 그녀 일행이 앉아있던 테이블로 가려고 했... (다고 하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피했다는 것은 1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아휴, 시끄러워.' 내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음...  했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짐짓 친한 척, 이미 가까워진 척, 두렵지 않은 후배로 여기는 척.. 해야 했으므로 내 딴에는 '아유, 그쪽 시끄러워요' 뭐 그런 말로 낯선 존재를 넘어 이제는 일원이 되었다는 정도로는 말을 건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뮬론, '시끄러워!' 같은 그런 워딩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당사자가 그런 정도의 '느낌'으로 들었다니 ...

나 참...


게다가 그 빨간색 실뜨기 휴대폰 주머니. 그건 정말 내게도 할 말이 있다.

A의 그 '거친' 복장에 한 가지 놀라운 포인트가 더 있었는데, 바로 실 뜨게로 만든 휴대폰 주머니였다.

빨간색 그것을 덜렁덜렁 매고 다니는데, 빨간 츄리닝과 잘... 어울렸다기보다는, 그녀의 멘털 상태를 더욱 강조하는 듯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실뜨게 주머니를 스몰 토크 소재로 삼아 쉬는 시간을 마치고 강의실로 들어오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그 빨간 주머니 예쁘네요. 휴대폰 넣는 거예요? '

'이거요? 우리 친정어머니가 떠주신 거예요, 이쁘죠? '

 에엥? 친정어머니.. 라고?  결혼을 했어?


그랬다. 그녀는 군대를 다녀온 아들도 있고, 멋쟁이 친정엄마를 모시고 사는.. 그러면서도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던 것. 친정엄마라는 그 말에 긴장했던 내 마음은 풀렸고, 그렇게 3박 4일의 일정이 끝나고 수료식 날이 되었는데... 끝나가던 수료식장에서 A가 소리치며 '저, 이거 예쁘다고 하셨던 분이요. 이거...' 그러면서 주겠다는 듯이.. 나를 찾았던 것.  


사실 나, 그 주머니, 조금도 갖고 싶지 않았다.

센 언니 포스의 골드미스가 아니라 친정엄마가 있는 나 같은 주부겸 직딩아라는 점이 급 친근하게 생각되어 과장해서 이쁘다고 칭찬했던 건데...그걸 주겠다고 하다니 ...


'저요, 저~'

다시 한번 오버하면서 좋다고 달려 나가 그 빨간, 실뜨기, 휴대폰 주머니를 A로부터 넘겨 받았다. 손에 자마자 내 어깨에 질러매며 좋아라 오버 액션까지 했었다. 주는 사람 기쁘라고.

그러고는 우리 집 안방 옷걸이에 버리지도 남주지도 못하는 애매한 물건으로 지금도 걸려있는 그 물건. 그것이 센 언니 같았던 나와의 관계 개선을 기대하며 건낸 뇌물이었다니...  


충격적인 고백의 밤도 지나고 1박 2일의 워크숍을 마친 귀경길.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옆자리 분께 물었다.

'글쎄 A가 저를 첫 인상에 센 언니로 보았대요. 제가 정말 센 여자처럼 보이세요?'

(A가 센 여자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모~~~ 두 그렇게 생각할테니까. )


아휴, 말도 안 되죠..

이런 답을 기대했는데...

'네, 두 분 다 센 언니 맞긴 한데... 다만 결이 좀 다르다고나 할까요'

더 이상 말을 않고 입꾹다물고 서울까지 왔다. .


그런데, 지금 이렇게 글로 옮기고 보니 기분이 살짝 좋아지는 느낌이다.

A는 진짜 실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다. 그런 그녀가, 나를 보고 주눅 들었었다니,

나 좀 카리스마 있는 건가, 그런 거야? 하는 생각. 히히히.   


센 여자들이 센 여자를 만나 서로 무서워했던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해야겠다. 우하하하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