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는 딸이 왔다. 사위를 대동하고.
사위는 피아니스트이다. 그런데 피아노보다도 자전거라면 벌벌 떨 만큼 자전거 사랑이 넘치는 청년이다. 뉴욕에 있는 음악원 재학 당시에도 자전거 점포에서 일했으며 언젠가 자전거 가게를 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딸과 결혼할 때 사위 선물로 로렉스 시계를 사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로렉스 시계 사라고 준 돈으로 자전거 2대를 사버렸다. 바로 접는 자전거 브롬튼. '어머님이 결혼 선물로 사주신 거' 라며 출근도 자전거로, 휴일 운동도 자전거로 하며 지내고 있다.
사실 나는 딸의 결혼을 앞두고 예물시계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또 로렉스가 그렇게 고가의 물건인 줄도 전혀 몰랐고. 그저 아이들이 커플 반지만 주고받으며 결혼을 준비한다기에 '평생 기억하며 간직할' 좋은 물건 하나 마련해 주자는 생각으로 '로렉스 시계' 이야기를 했던 것인데, 사실 나 같은 수준에서 암부로 내뱉을 말은 아니었던 시계였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피아노 치는 손목 위에 고급 시계가 있다면 멋지겠네.. 하며 딸에게 이야기했는데 며칠 뒤 딸에게서 전해 들은 말은 놀라웠다.
'엄마, 그 시계. 로렉스 그거 여기서 못 사. 어머니(예비 시어머니)께 여쭈니 LA 나 가야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구할.. 까 말까... 할 거라고 하시던데. 근데 그거 가격 알고 있었어? '
그때부터 로렉스 탐구생활 시작. 그리곤 정말 까암짝 놀랬다.
아니 이게 그렇게 비싼 거였어? 사기도 어럽고?
언젠가 남대문시장 가다가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 길가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줄지어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고 놀랬던 적이 있었다. 왜들 이러지, 백화점 앞에서? 그랬었는데 그것이 바로 샤넬 혹은 로렉스시계 매장에 들어갈 번호표를 받으려고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는 거였다는 사실. 딸에게 그런 상황을 듣게 되었을 때, '로렉스 시계, 그거 없던 이야기로 하자' 해야 했었는데, 한번 사두면 평생 자랑이 되고 그 가격이 점점 높아진다는 소리에 로렉스를 구매하는 일 자체가 흥미로운 목표가 된 느낌. 하여, 국내에서 혼인 예물로 산다는 수준의 구입비를 주겠으니, 니들이 형편껏 사보거라... 고 말했던 것. 안 해도 될 일을 그렇게 했다, 내가!!.
그러고 나서 시계값 마련하느라 고생 많이 했다. 달러환율이 하늘같이 치솟던 2022년 여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우여곡절이 있는 돈을 건네주었는데 결혼식이 지나도 시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과 사위가 내게 통고를 하였다. 시계 사라고 주신 돈으로 자전거를 사겠다는 것. 그 집에 자전거가 4대나 있더구먼 무슨 자전거를 또?
사위는 설명한다. 이건 제가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자전거. 바로 브롬톤. 결혼 선물이니까 커플로 사서 둘이 타고 다니겠단다. 로렉스 시계 사줬다는 생색낼 일이 스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저들이 원하는대로 해야지. 그 집에 브롬튼 자전거가 들어오던 날. 나는 아직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딸과 사위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딸은 자전거를 즐기지 않던 보통의 처녀였다. 우리 집이 언덕 동네인 데다 서울 강북 어디서 자전거를 슝슝 탄 단 말인가. 그저 초등학교 무렵, 남들 다 인라인스케이트 타면 딸도 탔고, 친구들이 자전거 배운다고 하면 딸도 배우곤 했지만, 그것도 한강 고수부지까지 일부러 차를 타고 이동해서 타곤 했던 것이 전부였는데, 자전거를 즐기는 남자 친구를 만나더니 자전거 데이트도 하면서 슬슬 동화된 듯했다
사위는 이 브롬튼 자전거를 1시간 거리의 출근길에 타기도 하고, 일요일 교회 가는 길에는 양복을 따로 챙겨 들고 가면서도 신나게 타고 다녔다. 그렇게 나의 실수로 마련할 뻔했던 로렉스 시계는 브롬튼 자전거로 탈바꿈하여 딸 내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그 브롬튼 자전거, 지난해에는 두 대가 서울 우리 집에 딸 내외와 함께 같이 왔었다. 사위가 제 아버지와 서울서 부산까지 라이딩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딸과 사위가 유럽에서 보낼 두 달 동안 의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비싼 비행기 요금 따로 내고 서울까지 모셔 온 것이었다. 사위는 결혼 후 서울 처가댁에 처음 인사 오는 길이었는데, 바깥사돈이 아들과 함께 먼저 오셔서 사돈끼리 인사도 나누고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라이딩도 하였던 것. 나의 사위는, 자기 아버지와의 장거리 자전거 여행이 평소 꿈꾸던 일이었는데, 결혼과 함께 한국이 한껏 가깝게 생각되니까 꿈꾸던 자전거 여행을 한국에서 해 본 것이었다.
바깥사돈도 사위도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시간을 아이들의 그 브롬튼 자전거로 해 보셨다.
바깥사돈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그 후엔 딸 내외가 자전거 두대를 챙기며 서울서, 유럽서 두 아이의 발로 사용 되었다.
올해, 딸 내외의 두 번째 서울 방문길에 사위는 또 브롬톤 자전거를 갖고 왔다. 짐이 많았던 딸은 필요한 경우엔 따릉이를 빌려 타겠다며 자기의 브롬튼은 집에 두고 왔다. 사위는 가져온 브롬튼을 침실에 두고 지내면서 여유가 생길 때마다 불쑥 들고나가서 한바탕 라이딩을 하고 들어온다. 며칠 전엔 얼굴에 웃음기 가득한 체 집에 들어서면서 하는 말, '어머니, 서울은 정말 자전거 타기 너~무 좋은 곳이에요, 너무너무 행복해요. '
서울이? 자전거 타기 좋다고? 그냥 브롬톤이 좋다는 말 아녀?
아내가 좋으면 처갓집 기둥 보고도 절을 한다더니, 그토록 좋아하는 브롬튼 자전거까지 합쳐져서 서울이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라고 만만세 부르는 것 아닌지..?
자전거를 타며 파워를 만들어 낸다는 우리 사위.
오늘도 모자 하나 눌러쓰고는 자전거에 올라타 우리 아파트 그 경사진 비탈길을 바람을 일으키며 내려갔다. 저런 모습을 보니 로렉스 시계가 다 뭐였던가 싶다. 자전거와 함께 하는 활기찬 모습, 최고다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