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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무개 Dec 27. 2024

《심연으로 가라앉기》 5

윤아무개 단상

   。

   즐거운 연말. 내가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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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는 모두가 아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 견해는 아렌트의 맥락에서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아렌트의 맥락에서’라는 말은 빼도 좋지만 일단 그렇다. 한편으로 나는 움베르토 에코가 이야기한 ‘완강한 무관심’을 떠올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완강한 무관심이라는 개념을 좋아해요. 완강한 무관심을 계발하려면 어떤 분야의 지식에 자신을 한정해야 하지요. 전적으로 모든 분야에 탐욕스러울 수는 없어요. 모든 걸 다 배우려고 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지요. 문화란 이런 의미에서 망각하는 법을 배우는 법에 대한 거예요.”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당신이나 저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제안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이론을 확실하게 아는 건 전문가들의 몫으로 남겨두지요. 진짜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문가가 될 권리가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에코의 말로 아렌트의 개념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에코는 에코대로 옳고 아렌트는 아렌트대로 옳다. 그러면 당신은 아렌트의 말과 에코의 말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고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아렌트의 이야기는 사고에 관한 것이고 에코의 이야기는 지식에 관한 것이다. 그럼 이걸 왜 연관 지었느냐? 여기는 심연이니까. 무작위로 떠오르는 것들이 엉뚱하게 엮이는 공간이니까. 마음에 안 들면 당신이 나의 심연에서 나가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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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지 않으면 심연에서의 창조라는 비밀을 엿보게 될 일.     


   。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려 했다면 누구든 예수가 12월 25일에 태어났을 리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은 창조적 행위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이미 피조물로 포화 상태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고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어 또 다른 피조물을 창조해낸다. 어느 시점부터 거듭되어온 창조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생겼다. 파괴다. 창조는 기존의 피조물이 파괴된 잔해의 빈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행위는 파괴를 선행으로 행해지는 창조적 행위다. 가령 내가 당신에게 창조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럼 당신은 창조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들을 이유가 없다. 당신은 창조라는 개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그것을 파괴하고 해체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낸다. 물론 동시에 세상 다른 곳에서는 누군가가 또 다른 이에게 창조란 무엇이냐고 물어볼 것이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똑같은 물음과 유사한 답변이 창조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유의미한 유사품이라 부르겠다. 유사하지만 약간씩 다른 창조의 결과가 예술의 역사다. 나는 한낱 인간이다. 한계를 지닌 인간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생각할 수는 없다. 내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창조해내는 생각의 과정을 거칠 수는 없다. 그럼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완강한 무관심의 영역에 나의 보물들을 밀어 넣어 미뤄 놓겠다. 보물이라는 이름은 방금 붙였는데 너무 낡은 이름 같지만 그래서 푯말로써는 안성맞춤이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 완강한 무관심의 영역에 있는 보물 중 하나가 크리스마스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 과거에 언젠가 크리스마스에 대해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를 마지막으로 생각했을 때 나는 축제를 위한 축제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개인적으로 꽤 빛나고 마음에 드는 표현이라고 생각해 서둘러 완강한 무관심의 영역에 넣어 버렸다. 세상에, 그것도 세계에 퍼져 있는 수많은 이들이 즐기는 축제를 위한 축제가 하나쯤은, 그것도 연말에 있다는 것은, 그냥 좋아할 만한 일이라는 마음이다. 내가 생각지 않는 보물 중에 또 하나는 사랑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지 않는다. 그건 그냥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기 파괴. 자기모순. 비겁함. 비열함. 광기. 무기력. 무력함.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왜 사는가. 실존이란 무엇인가. 핏줄이란 무엇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은 왜 존재하며 왜 필요하거나 필요치 않은가. 크리스마스나 사랑 같은 것은 다른 누군가가 혹은 과거의 나가 훌륭하게 생각해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여력도 없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

   여기 네 친구가 모여 산다. 은행원과 백수와 교사와 대학원생이다. 은행원은 은행에서 일하고 백수는 일자리를 찾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학원생은 연구를 한다. 어느 날 그들이 자던 중 집에 이유 모를 화재가 발생한다. 그러면 그들은 소방관이 아니지만 소화기를 찾아 불을 끈다. 그때는 그들이 소방관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은행원의 의견이고, 소방관이든 아니든이 아니라 이 집의 구성원이면 당연히 불을 꺼야 한다, 백수의 의견이고, 애초에 소화기를 사용하는 것은 소방관의 자격이 필요 없다, 교사의 의견이고, 대학원생은 소화기를 찾지도 않았다, 그것은 한 사람이 행하지 않음―혹은 못함―을 행했던 것을 세 사람이 목격한 사실이다. 은행원은 대학원생에게 너는 수고 없이 안전을 누리느냐며 뺨을 날리고, 백수는 연기 속에서 대학원생이 괴로워했다는 걸 봤다고 했고, 교사는 그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사실이었다고 해도 모두가 괴로웠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대학원생밖에 없다고 했다. 대학원생은 말이 없다. 그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고,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집이 아예 타버렸으면 생각할 너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은행원의 의견이고, 만약 화마에 휩싸여 우리 모두가 불타 죽었을 때 제 삼자가 우리더러 왜 안에서 불을 끄지 않았느냐고 책망한다면 그것이 옳을까, 백수의 의견이고, 너는 왜 갑자기 딴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타 죽지 않았고 그 이유에는 우리 셋의 수고가 있으며 대학원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교사의 의견이다. 대학원생은 미안하지만 이제 연구실에 가야 할 시간이라며 집을 나선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맞으나 덤으로 살게 되었으니 무엇을 해야 했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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