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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농업자 May 07. 2024

존재의 가치

"폐역이 선사하는 존재의 향기"

2019. 10.  삼척 심포리역에서 

호젓함을 찾게 되는 그런 날이 있다.

그럴 때면 호젓하다 못해 때론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폐역을 향해 길을 나선다.


폐역이 목적지인 여로에는 설렘이 실리지 않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속절없이 낡고 녹슬어가는 광경들을 보면

형언할 수 없는 허망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언제 마지막으로 열차의 무게를 느껴봤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선로 위를 까마득히 걷고, 풀숲을 헤쳐야만 겨우 당도할 수 있는 외로운 역사들이 있다. 심포리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찾는 이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 역사는 역명판만큼이나 녹슨 자물쇠가 굳게 걸려있어 혹시나 하는 맘에 챙겨 왔던 극소량의 설렘도 앗아가기 마련이다.


세월의 무상함과 어떠한 타협도 오가지 않은 채, 묵묵히 낡아가고 있는 폐역들은 존재와 소멸을 사유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투박한 활자의 역명판, 고색창연한 역사 내 시간표와 안내문들은 수십 년 전 끊겨버린 만남과 이별의 교차점에 서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도, 열차도 오지 않는 폐역에 나는 존재의 가치를 잠시 채워 넣는다.


2023년 3월 국내개봉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을 부르는 문이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 각지의 폐허를 찾아 나서는 주인공 스즈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승의 문을 빠져나와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를 봉인하려면 눈을 감고 폐허가 되기 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상상해야 했다. 스즈메는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지는 장면들을 상상하면 나타나는 열쇠구멍을 통해 문을 닫아 재난을 막아냈다.

 목적은 달랐지만 폐허를 찾아 그곳의 찬란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장면들은 마치 폐역을 찾아 나서는 나의 모습을 오마주 한 느낌이 들어 꽤나 감명 깊게 본 기억이 있는 영화였다.

 (얼마나 감명 깊던지 일본까지 찾아가 현지에서 전시회를 보고 굿즈까지 아낌없이 쓸어 담아 왔다. 스즈메는 문단속에 성공했지만 나는 지갑단속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먼 타지로 자식을 보내는 부모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연인, 그렇게 먹먹한 이별이 있는가 하면 다가오는 설렘과 행복도 변주했던 공간. 철마가 당도하고 떠나기까지 역사는 그들의 마음을 묵묵히 품어주는 존재였다. 


 더 채우지 못해 이내 완성하지 못한 인연들로부터 얻은 아픔들을 나는 폐역에서 잊어냈다. 손에 닿지 않을 만큼 아득한 과거 속 숱한 만남과 이별의 시간들 사이에 슬며시 나의 이별을 내려놓고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다 쓰러져가는 역사의 존재 가치를 채우곤 했다.

2019. 5. 남원 (구)서도역에서

 여행가들 사이에서 과거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잘 정돈된 폐역들은 좋은 여행지로 손꼽힌다. 보통 보고 즐길 거리보다는 레트로 감성에 한껏 적신 사진 한 컷이 가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곤 한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발길로 이어지는 제2의 삶을 누리고 있는 폐역사들도 있지만,  시간의 뒤안길로 밀려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있는 폐역사들도 많다.  존재의 가치가 없어지며 소멸하는 것이다.


 나 하나쯤 그곳에 간다고 철거가 예정된 공간이 다시 되살아나고 유명해질 리 만무하다.

 그러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전국의 폐역들 사이 그래도 내 발길이 닿았던 곳만큼은 존재의 가치를 잠시라도 찾을 수 있었으리라. 


 무언가의 가치를 채울 수 있는 존재임에 나지막한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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