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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미reme Mar 18. 2024

앨리스의 낮잠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어떻게....’


조잘조잘 시답지 않은 말들을 주고받는 현실에서 멀어지며 다시 아득한 나만의 생각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그럴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한 마디, 

‘어떻게 하지?’


뭘? 뭘 어떻게 하냐는 말이야? 

난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답을 기다리는 누군가의 앞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사랑스럽고 해맑은 딸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누고 장난을 치다가 시간이 되면 잠자리에 들참이다. 

조금 전에도, 지금도, 심지어 내일도 나에게는 딱히 신경을 써야 할 일도, 신경이 쓰이는 일도 없다. 

더 전체적으로 보아도 굳이 욕심내어 따지고 불평을 만들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편안한 삶이다.

그런데도 잠시 나의 감각이 한눈을 팔고 세상과의 연결에 틈이 생기면 여지없이 어떤 목소리가, 아니 나의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건다. ‘어떻게 하지?’라고.

그리곤 이내 곧 당혹스러움에 얼어버린다. 갑자기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지금 내게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어서 빨리 알아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에 휩싸인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내 안의 지혜로움이 나에게 알려주는 신성한 메시지인지,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불안을 놓지 못하는 나의 강박인지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조용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혼란함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잠시 내 앞의 모든 존재들을 물린 채 나를 흔드는 것의 정체를 알려줄 것 같은 강의를 찾아 들어보기도 하고, 날고 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조언이나 경험담을 ‘나중에’ 보아야 할 리스트에 차곡차곡 쌓아가기도 한다. 그러다 알고리즘이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겠다는 듯이 계속해서 비슷한 콘텐츠들을 들이밀어 대는 통에 괜스레 혼자 염증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래도 다시 실천할 목록들을 정해 시도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한다. 명상을 하거나 일기를 써보기도 하고, 남편의 피로로 어두워진 얼굴을 애써 무시하며 충동적으로 생성되어 올라오는 말들을 실컷 토하듯이 내뱉어보기도 한다. 내게 이토록 중요한 문제를 위해 잠깐의 수고를 해준다면 당신의 사랑인 내가 더 훌륭해짐으로써 당신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런 시간들은 쌓이고 쌓여 몇 달이 되고  몇 년이 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 올라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에 현실로부터 나를 분리시키는 경험들이 반복되었고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삶을 낭비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잘 살고 싶었다. 

행복하고 싶었고, 성취하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었다. 

느끼고 싶었고, 경험하고 싶었고, 나누고 싶었다.

내가 머무는 공간들을 사랑하고 싶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었고,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싶었다. 나의 하루를 기뻐하고 싶었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잘 살고 싶었다. 

후회 없이 잘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삶을 살아가는 것’조차 잘하지 못했다. 내 앞에 버젓이 펼쳐지는 현실을 미뤄둔 채 자꾸만 삶에서 벗어나 내 머릿속을 헤매고 다녔다. 머릿속에서 올라오는 증거들을 그러모아서 삶을 잘 살 수 있는 지도를 그리고 지우고 다시 만들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정작 나는 삶에 없었다. 먹고 있는 음식도 음미하지 못했고,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 저리게 간절한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머릿속에서 살고 있었다.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잘 살고 싶어서 나는 삶이 아닌 곳으로 자꾸만 떠났다. 계획 속으로, 자책 속으로, 지침 속으로, 판단 속으로, 불만 속으로, 걱정 속으로, 추측 속으로, 부끄러움 속으로, 

내 속으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줄 것 같은 나를 찾아 내 속으로 들어가서 헤매는 동안 나는 내 삶을 잃었다.      



그 긴 시간의 유일한 수확이라면 이제 나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홀린 듯이 내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는 것일 것이다. 산들바람처럼 불어오기도 하고 폭풍처럼 휘몰아치기도 하는 나의 목소리들은 내가 놓쳐서는 안 되는 내 안의 진실들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사이렌에게 홀린 어부처럼 넋을 놓고 빠져버린 내 속에서는 어떤 구원도 없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여전하다. 그리고는 바람을 따라 삶을 놓고 잠시 지금 여기를 떠나기도 한다.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가기를 바라보고 있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어떤 때는 그러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바람에 실컷 휩싸여버리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놓아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찾아오는 후회와 자책의 시간마저 바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더욱 힘들어 더 오랜 시간의 삶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내 앞에는 나의 사랑스럽고 해맑은 딸들이 재잘거리며 웃고 있다.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파자마소매가 약간의 보풀이 일어난 채로 뽀얗고 보송보송한 손목뼈 위로 살짝 올라가 있다. 저 부드러운 손목을 잡고 코끝을 갖다 대면 달콤하고 따뜻한 냄새가 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언니의 장난에 웃으면서도 살짝 불편한 기색이 스치는 막내는 아마도 내가 마음을 알아주면 살짝 눈물을 그렁거리며 어린양을 할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이마에 약이 올라 붉은 여드름이며 아슬아슬하게 맞는 파자마까지,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놀라울 뿐이다. 아가씨태가 나는 첫째와 둘째는 방학을 맞아 늦춰진 수면패턴에 아직도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 잘 기세가 아니다. 방학 동안에만 유지하겠다던 첫째의 갈색염색머리는 그새 검은 머리가 자라서 멋 부리는 십 대 소녀의 염색모를 더 도드라지게 반짝인다. 밖은 춥고 어둡고 고요하다. 따끈한 전기장판의 온기로 덥혀진 보드라운 이불에서 올라오는 향긋한 냄새에 기분 좋은 나른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평화로운 이 밤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온통 내 영혼을 채운다. 퇴근이 늦는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며 아이들과 웃음소리로 방을 채우고 있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너무나 소중한 가족의 존재를 다시 느끼며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 눈앞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아이들의 존재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은 내 목소리와 상관없이 반짝이고 있다. 평화롭지만 생동감이 넘치고,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더없이 찬란하고 장엄하다. 무엇보다 실재하는 것들 속에 실재하는 나를 경험하는 소중하고 유한한 장이다. 


바람처럼 변덕스럽고 정체를 알 수 없어 혼란에 빠트리다가도 안개처럼 온데간데없이 흩어져버리는 내 목소리가 아우성치는 곳과는 다르다. 내가 피어나고 만끽하고 싶던 곳은 현실의 삶이다. 이곳을 떠나 답을 찾던 나의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위로하며 아직도 나에게 삶이 주어져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잘 ‘살고’싶다. 

삶을 살고 싶다. 

새털바람에도 여기저기 흩날리며 정처 없이 헤매다가 현실의 삶을 충분히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며 허무하게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내게 주어진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다 음미하고 경탄하고 떠나고 싶다.

지금 나의 사랑스럽고 해맑은 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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