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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빈 Jun 01. 2024

조막만 한 용사

괜히 돌아서 집을 가고 싶은 날, 하필 수많은 갈림길 중 모교를 지나간다던지, 하필 교복 입고 자주 가던 분식집을 지나간다던지, 하필 친했던 친구의 옛날 집 근처를 지나간다던지. 많은 하필의 연속은 사실 그립다는 핑계였음을 지금의 나는 인정한다.




처음 남자아이를 밀치며 소리쳤을 때를 기억한다. 왜 그렇게, 무엇이 화가 나 제 또래만 한 아이를 밀쳤을까. 옆에 있던 여자아이는 내 팔을 붙잡고 남자아이를 보며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상대의 반응에는 힘이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내가 옳다는 확신 때문이었을까. 마치 추진력이라도 붙듯, 당당하게 쏘아붙이던 어린 시절의 내가 말했다.


 '자꾸 놀리니까 얘가 힘들어하잖아'

  

순수하기 짝이 없는 초등학생의 대화란 그랬다. 걸어오는 싸움에는 응당 반응을 취해 줘야 하고, 어른들이 봤을 땐 귀엽다고 생각할지언정 그때의 우리는 의리 빼면 시체인 조막만 한 용사이다. 그렇게 내 일도 아닌 친구의 슬픔을 등에 업고 한바탕 쏘아붙이고 나면 스스로 뿌듯해했다. '역시 네가 최고야!'라고 돌아오는 반응의 으쓱함은 덤.


그렇게 추억에 잠겨 있을 때, 문득 든 생각은 '왜 그랬지?'였다.


친한 친구를 괴롭혀서? 당연하게 보였어야 할 행동이라서? 그게 옳은 행동이니까?. 그 시절 나의 세상은 부모와 친구, 단둘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상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들어갈 자리에 친구라는 자리를 더 넓히고 있었다. 아마 그들의 감정은 내 것이었을 순간들이었다. 친구의 고통은 나의 고통, 친구의 슬픔은 나의 슬픔. 본능에 가까운 흡수력은 그 감정이 '나'의 감정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애초에 어린아이의 경험은 어른에 비해 한없이 적다. 경험이 있다는 건,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어 나를 좀 더 보완할 기회를 주지만, 생각하게 만들기에 스스로를 한없이 작게 만들어 주저함을 심어준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때론 본능적이고, 때론 지나치게 솔직하며, 또 때로는 이름 모를 감정에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난, 그 감정이 내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것이라 한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마음에는 경계가 없었기에.


가끔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어린아이에게 배운다, 위로받는다'라고 말한다. 나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저하지 않는 곧은 눈빛과 말투는 지금의 내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부러움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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