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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miryu
Jan 02. 2025
붙일 순 없지만
내려놓고 너그러워져야 할 시간
캐리커처 인형 작업을 하면서 생긴 일이다.
내가 작업하는 캐리커처 인형은 실물이나 사진 등을 토대로 실사판에 가까운 피큐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물의 특징을 잘 잡아내는 게 중요하지만, 실물보다 예쁘거나 훤하게 만들어줘야 고객의 불만 사항이 적다.
작품성 보다, 주문자의 요구에 맞게 충족되는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
나는 주문자가 보내온 인물 사진을 참고해서 입체화 작업을 한다. 1, 2주 이상 걸리는데, 2인 이상이거나, 뒷배경이 들어가면 더 소요된다.
소량의 일거리지만, 색다른 경험이라 즐겁고 부차적 수입도 나쁘지 않았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주재료인 점토의 단점을 보완해야 했다.
부서지지 않아야 할 것. 무게가 가벼워야 할 것. 차후 변형, 변색이 없을 것 등.
그런 질 좋은 점토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 모든 게 충족되는 완벽한
점토가
있었다.
고운 진주 가루 원료가 들어간, 최상급 일본산 점토다. 현지에서만 구매할 수 있고
,
한정된 수량만 생산해서 아무리 돈을 사 들고 가도 살 수 없다.
내가 소속된 **공예 협회장이 그 점토 판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협회장은 이전 화(그때 알았다면)에서 다루었던, 내가 처음 강사로 일했던, O 학원의 원장님이다.
높은 자리에 있어도 야심이 대단한 분이다.
O 학원을 나온 뒤로, 원장님과는 전시회 같은 큰 행사나, 자격증 시험을 주관할 때만 만났다.
소속된 협회를 나와 새로운 공예를 접목하면서 그분과는 점점 만날 일이 줄어들었다.
나는 조용히 살고 싶은데, 그분은 여전히 나를
지켜보
고 있었다.
내가 캐리커처 인형을 만든다는 걸 듣고는, 그 소문을 낸 K 지역 지부장 편에 그 귀한 일본산 점토를 보내왔다.
K 지부장은 가끔 나를 찾아와 듣고 싶지 않은 원장님의 근황에 관해 알려주었다. 원장님 쪽에도 내 소식을 퍼 날랐을 게 자명했다.
K 지부장은 나와 원장님 간의 가교 역할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반목의 골을 깊이 파주었다.
친근하게 다가와서 제 실속을 챙기는 이런 사람은 그 목적이 뚜렷해서 오히려 다루기 쉽고 편하다.
그러나, 원장님 같은 분은 수십 년을 겪어도 힘들었다.
원장님이 내게 귀한 점토를 보내 준 건 얼핏 선의로 보이지만, 도움을 주려는 게 아니다.
'너는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은 거였다.
그분 밑에서 늘 겪어왔던 일인데 잊고 있었다.
알면서도 경쟁력 있는 인형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심에 원장님이 내민 손을 슬쩍 잡았다.
여러모로 그 귀하신 몸값이 붙은 점토로 캐리커처 인형을 만들었다. 특히 단가가 높은, 특별한
웨딩
인형을
만들
때만 썼다.
캐리커처 인형이 완성되면 본인이 직접 찾으러 오는 경우도 있는데
,
그때 기분이 참 묘했다.
인형과 닮은(물론 내 눈에만) 실제 사람이 걸어오는 걸 보면, 신기하다.
만약 이상형이었다면, 피그말리온 현대판처럼 되었을까.
손에 트로피처럼 감싸 쥘 수 있는 크기인 30cm 내외의 인형은, 집에도 데려가서 만들곤 했다. 거의 잠들기 직전까지 붙어 있으니, 정이 들 수밖에 없다.
그게 인형 남자가 아니라, 커플이나, 아이가 있는 가족들이 대부분이지만.
캐리커처 인형은 수강과 다른 일거리 틈틈이 만드는 거라서, 공방에서 호기심 많은 아동 수강생의 손을 타게 된다.
어느 날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한 학생이 장난을 치다가 인형을 깨뜨렸다.
거의 완성 단계였다.
웨딩 인형 중에 신랑의 목이 댕강 잘려 나갔다. 목만 똑 부러지면 붙이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신부의 드레스까지 자잘하게 금이 갔다.
대부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원장님이 독점할 만큼 진주 가루가 들어간, 절대 부서지지 않는 최상급의 일본 점토였다.
그런데, 쉽게 깨졌다. 일반 점토와 다를 바 없이.
이런 식으로 점토의 강도를 검증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원장님이 과연
내게 그 귀한 점토를 나누어준 건 맞나 싶고
.
아니면 내 일을 방해하고 싶었던 의도가
있진 않았을까... 의심이 꼬리를 문다.
진실이 무엇이든
,
이젠 억지로 붙일 수 없게 된 목 잘린 인형처럼
원장님과도 그렇게 된 것이 도리어
다행스러웠
다.
웨딩 인형을 깬 학생이 집에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애 엄마가 한달음에 공방에 들이닥쳤다.
제 아이의
잘못에 대해
사과라도
하러
왔거니 했는데.
"선생님이 우리 ㅇㅇ이를 울렸어요?" 하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ㅇㅇ이를 울린 기억이 없었다. 야단친 것뿐인데, ㅇㅇ이 집에 가서 서러웠나 보았다.
나는 내 자식과도 같은 창작물인 인형이 깨진 게 화가 났고. ㅇㅇ이는 제가 그걸 깨트려서 속상해서 울었던 것이고. ㅇㅇ이 엄마는 제 아이를 울린 것만큼 세상에 더 큰 일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
대부분 자신에게 속한 것을 지켜내려고 그 한계에 가두고 산다.
나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리인, 공방에서 숨이 좀 트일까 싶었다.
여전히 내 노력과 상관없이 원활하지 못한 관계성과 상업성이 도드라지는 컨셉추얼 한 일을 반복하고 있다.
정답은 얻을 수 없다 할지라도.
부서진
건 붙일 수 없고, 이제 부서진 걸 내려놓고 너그러워져야 할 시간이다.
나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
keyword
인형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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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길게 오!오! 이얼즈
01
프롤로그
02
고소한 날
03
귀여운 악당
최신글
04
붙일 순 없지만
05
5화가 곧 발행될 예정입니다.
2025년 01월 09일 목요일 발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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