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30년 된 관음죽이 있다.
30년 내도록 크고 넓은 잎사귀만 무성하게 뻗어나가던 식물이었다.
작년 4월 말경에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올해도 5월 초에 다른 가지 두 곳에서 꽃이 나왔다.
관음죽은 꽃을 보기가 힘든 식물이다. 꽃 모양도 무척 특이하다.
벼 이삭 형태와 비슷한, 작은 분홍색 알맹이가 빽빽하게 모여서 꽃을 이룬다.
딴 주머니를 차듯 볼록해진 가지에서 꽃봉오리가 나올 때는 무척 신기하다. 30년 만에 꽃을 피우고 있으니, 신비롭고 경외감마저 들었다.
꽃봉오리가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지며 꽃 모양이 되어간다.
그런데, 꽃이 활짝 피고 만개할수록 어딘가 이상했다. 꽃 같지 않았다. 분홍색이라서 꽃인 줄 알지. 이건 괴이하달까.
닭발이 꽃으로 환생했나 싶게 그 생김새와 비슷해 보였다.
무려 30년 만에 꽃을 피워냈는데, 예쁘지도 않고 향기도 없었다.
꽃 피우느라 애쓴 관음죽. 미안하지만 넌 꽃 같지 않아.
아버지 생전에는 관음죽꽃을 보지 못하셨지만, 특별히 아끼던 식물이었다. 적극적으로 물을 주거나 영양제, 꽃 거름, 화분 갈이에 힘을 보태지는 않았지만, 말 없는 식물이 필요한 처방이 무엇 인지 먼저 알아챘다.
올해 5월은 아버지가 소천하신 지 3주기가 되었다.
지난주 아버지를 뵈러 현충원에 다녀왔다.
약속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큰언니는 한 시간 늦게 온 작은 언니 때문에 화가 났다. 주차할 공간을 못 찾거나, 그조차도 양보하다가 뒤처진 오빠도 못마땅하다.
엄마 또한 다른 이유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내가 죽더라도 닭장 같은 곳에 가두지 말라고 하신다.
바깥에 확 트인 묘역은 다 차서 현재 안장되시는 분들은 납골당에 모셔야 한다. 배우자가 같은 곳에 합장되니, 엄마는 그 막힌 공간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아버지 곁에 안 가면 어디 가시려고?"
내 물음에 엄마는 화장해서 아무 데나 뿌리란다. 아,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기어코 화를 내버린다.
우리는 지정된 참배 실에 들어가서 주어진 시간 20분 동안 추모 예배를 드렸다.
대체로 서로 성격이 맞지 않은 우리 남매들에게도 가끔 화기애애할 때가 있다.
아버지를 추억할 때다.
그날은 아버지의 낡고 오래된 구두, 양복 같은 것에 웃기고 슬픈 기억을 꺼냈다.
지난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구한말 때나 입을 법한 구두, 양복이 나왔다. 아버지가 엄마 몰래 꼭꼭 숨겨 두었다.
아버지는 워낙 검소, 검약하게 사시기도 했지만, 오래되고 못 쓰게 된 물건이라도 버리는 법이 없었다. 고이 모셔 두는 습관이 있었다.
1959년 봄, 부모님이 맞선 보던 날, 아버지가 입었던 양복이었고 신었던 구두라고 한다.
엄마는 아버지의 양복이며 구두가 얼마나 구렸고 후졌는지.
밥값, 찻값을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맞선 장소로 제과점으로 정한 아버지의 궁색한 꼼수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다.
"돈이 있어도 쓸 줄 모르고. 아무리 낡고 닳아도 버릴 줄 몰라."
엄마는 그 속에 담긴 애환을 너무나 잘 알기에 꾹 참고 눌렀던 눈물을 흘리신다.
아버지는 구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량처럼 사셨던 부친을 대신해서 일찍 가장이 되었다. 어머니와 미혼인 고모, 여덟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혼자 벌어서 건사했다.
대가족을 먹여 살리자니, 연애는커녕 결혼 적령기도 훌쩍 넘겨 버렸다.
아버지는 쇠 다루는 기술을 배워 자수성가하셨다. 사업이 한창 호황기를 누렸던 30대 중반, 늦은 나이에 엄마와 맞선을 봐서 결혼했다.
아버지는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간혹 하셨다.
당신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엄마는 덜 자란 듯한 (철이 들다 만) 모습이었다고 한다.
꽃으로 치면 봉오리도 아닌 피다 만 꽃.
내가 관음죽꽃을 보며, 꽃 같지 않아서 아쉬움이 들었던 마음일까.
피다 만 꽃을 데려와 80대까지 시들지 않게 잘 보살폈고, 아이 하나 더 맡아 기르듯, 어르고 달래며 살아왔노라고... 아버지가 우스갯소리로 하셨던 말이 기억난다.
4년 가까이 엄마 보호자로 살아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배우자에게 부성애로 사셨지만, 가끔 모성애를 바랐던 아쉬움이 있었을까.
백 세에 가까운, 긴 생애를 사셨던 것에 비해 짧게 아프시다가 돌봐 드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나신 아버지.
엄마가 아픈 당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아신 듯.
앞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힘든 일이 많을 거라고, 경험자의 배려였다.
죄책감, 후회는 오롯이 엄마에게 쓰라는 듯.
마음 한구석에서는 철없던 딸로 머물렀을 때가 그리워지는데...
유독 아버지가 보고 싶은 5월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늘 앉았던 소파 바로 옆에는 관음죽이 놓여 있다.
관음죽꽃은 연분홍색에서 연두색, 초록색을 유지하다가 검게 변한다. 가을에서 겨울 내도록 볼품없는 검정 알갱이를 떨어뜨리며 시든다.
30년 만에 꽃을 피웠지만 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