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런 정이 흐르는
세상에는 무수한 ‘정(情)’이 있다.
우정 애정 모정 부정 순정...
독서와 글쓰기를 하며 생긴 정이란 게 있을까.
활자가 주는 매력, 활자가 주는 기쁨 그리고 좌절, 고뇌, 아픔 등과 함께 서서히 스며드는 정.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감질나게 애태우는 정. 활자에 중독되고 미치는 지점에 들어온 정. 한번 맛 들이면, 쉽게 끊어 낼 수 없는 정. 그런 게 '글정' 일까.
'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니, 부끄럽지만 내가 쓰는 웹소설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나는 팬데믹 시기에 웹소설 작가로 데뷔했다. 내가 속한 장르의 출판업계는 2020년대 초까지 막바지 블루 오션이었다.
코로나 특수에 힘입어 전자책 플랫폼기업과 웹툰 웹소설 출판업계의 영업 이익이 크게 늘어났다. 그때는 대형 출판사가 생 신인의 글을 출간해 주었고, 유명 3대 플랫폼의 심사가 엄청나게 까다롭지 않았다. 신인에게는 막차에 올라 탈 기회였다.
내 안의 모든 이야기를 모조리 끄집어낼 수 있었던 열정. 누군가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 줄 거라는 기대. 막연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출간 후 판매 실적이 저조했고, 악의적이고 모욕적인 리뷰에 폭삭 주저앉기도 했다. 여전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서 소설 쓰기가 내 삶의 일부 루틴이 되었다.
그저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쓴다. 첫출발부터 두들겨 맞고 키운 글 맷집이라 풋풋한 단내보다 짠내가 난다. 시퍼렇게 멍든 정(情)인데, 질기게 오래가고 있다.
이렇게 희한하게 생긴 정이 뭔가 했더니 ‘글정’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정’이란,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다거나 싫은 감정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함께하며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차곡차곡 쌓이는 마음이다.
내게 그런 '글정(情)'이 붙었다.
'글과 정'의 조합은 내게 좋은 기능으로 발효하지 않았다.
‘글’은 이야기를 꾸며내고 싶은 구실이고 수단이었지만, '정'이 붙으니, 내 삶을 독식하려는 중독과 맞닿아 있었다.
가족과 밥 한 끼 먹을 시간 없이 첫 계약작에 사활을 걸었던 4년 전.
나는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한 끼라도 굶으면 죽는 줄 아셨던 아버지와 밥투정 아닌 밥 투쟁을 하며 맞서야 했다.
나에게 고작 한 끼가 아버지에게는 가족과 마지막 식사 자리인 줄 모르고 글만 썼다.
병원에 모셔놓고, 임종 직전까지도 나는 오직 글 걱정뿐이었다. 애틋한 '부정'을 저버리고 ‘글정’에 매몰되었다.
가족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가족은 내 편이어서 언제나 내 편의를 봐주며 기다려 줄 거라고.
글은 무수히 고칠 수 있지만, 그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수년 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 N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왜 하필....”
나도 모르게 속엣말이 나와버렸다. 내 여유 시간은 글 마감에 갇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던 나날이었다. 당장 해야만 하는 작업 외에는 중요한 게 없었다.
N의 부고를 전해준 B는 ‘왜 하필...’ 이란 내 못난 말을 들었는지 말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나는 N이 한 극단적 선택이 미웠고, 안타깝고 슬펐다. 내 심정은 여러 갈래로 복잡했다.
급한 일 먼저 끝내 놓고 바로 가야지 했는데, N의 장례식에도 추모하는 일조차 나중으로 미뤘다. 끝내 늦어버렸다.
내가 무언가 대단한 걸 한다는 듯이. 곧 무너질 모래성을 짓고 있어도 해야 할 일이라고.
글 핑계라도 대서 감정 소모가 큰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던 거였다. 출간에 차질이 생길까 봐서.
글로 차갑게 식히고 글로 예열하는, 복잡 미묘한 보호막이 생겨난 건가.
상업적 욕망이 가득한 글쓰기 범주에만 머물렀기 때문인지 다감한 정서와 애틋한 마음, 성찰, 충만, 각성이 다소 잘려 나가 버렸던 거다.
쓴맛을 본 뒤에야 피도 눈물도 없는 글정이라면 떼버리고 싶지만... 늦어버렸다.
'글정’은 작가일 때만 드는 감정이 아니었다.
미운 정 고운 정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나갈 것처럼 글을 쓰다 보니, 잘 쓴 글에 눈이 밝아진다.
좋은 문장, 공감되는 글, 재미있는 이야기, 놀랍고 기발한 상상력, 내가 썼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읽게 되는 글들에 독자가 되어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니 글정이 든다.
특히 브런치에서 작가이면서 독자가 되어 소통하는 경험을 해본다.
읽고 읽어주는 글정은 내가 힘겨울 때 도피처가 되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예전에는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나 때론 치부를 드러내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대체로 악플이 없고 선플만 있는 곳.
유료 구독 플랫폼으로 바뀌어도 글로 소통하며 이만큼 즐거운 공간이 될지.
나만의 글을 남기는 공간, 다양한 스타일의 이야기를 배우고 알아봐야 할 게 끊이지 않아서 아직은 즐겁다.
30화도 채우지 못한 부족한 글, 고비마다 나를 다독여준 정다움에 1년을 훌쩍 넘겼다. 그런 정(情)이 흘러서 다시 여름을 맞았다.
다감하고 애틋한 마음, 성찰로 충만한 '글정'이 내 안에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