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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전쟁

by miryu

가끔 전투나 전쟁 장면이 짧게라도 들어가야 하는 시대물을 쓸 때가 있다.

전쟁사 관련 책, 자료, 영상 등으로만 내 역량이 부족하다 보니 실제로 전쟁과 총을 경험한 분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개인의 전쟁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전쟁이란 걸 알게 된다.


미국인 사돈어른, 즉 동생의 시아버지는 적지 않은 총기를 소장하셨다.

주로 세계 1, 2차 대전에 사용한 총에서부터 존 웨인이 서부 영화에서 실제로 사용한 클래식한 총기들이다.

사돈어른은 살아있는 총기류 백과사전 같은 분이지만,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미국인이 개인 총기 소지가 어느 정도 허용되는지, 사돈어른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지 않았을까. 그게 더 걱정스러웠다.

사돈어른은 미국 헌법 두 번째 조항까지 들먹이며 완전 합법이라고 하신다.

FBI 신원조회에 걸리는 게 없으면, 총기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

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개인의 총기 소유에 느슨한 미국법이 이해도 수긍도 안 된다.


사돈어른이 작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뒤, 그의 유품 정리를 하던 가족들이 총기의 규모가 소규모 전시장 수준인걸 알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사돈어른은 평생 총기를 사들였다. 젊은 시절에는 주급 대부분을 탕진했다. 제부가 어렸을 때는 가정경제가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고 한다. 사돈어른은 아내가 힘들어 하자 총기 구입을 줄이고, 안정된 자금력을 확보하기 위해 힘썼다. 회사에서 그를 한직으로 좌천시키거나 은근한 명퇴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정년을 채웠다고 한다.

퇴직 후, 연금이 넉넉하게 들어와서 총과 함께 즐거운 여생을 사셨다.


사돈어른의 유품은 두 아들에게 따로 남겨준 총 외에 그의 뜻에 따라 박물관과 관련 협회에 기부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총기는 처리하는 데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동생도 시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은 총이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총이라고 한다. 그 안에는 충격적인 히스토리가 담겨 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딕의 이야기 밑에 번외 편에 적었다)

총을 사랑하는 사돈어른답게 한국인 며느리에게 그분 나름의 애정 표현인지, 특별히 아끼는 소장품을 나누어 주셨다.

동생은 총을 받고는 만지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있다.


총기 사고가 빈번한 나라에서 사돈어른처럼 총기를 다수 소장하는 사람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다만, 총으로 돈을 벌 목적이 없고, 사격을 크게 즐기지도 않으면서 총기를 모으는데 왜, 평생을 바쳤는지 궁금했다. 그것도 전투,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들로만.


사돈어른은 20대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고 들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친척 어른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는 총 쏠 일이 거의 없는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전쟁 중에 총에 관한 관심이 더 커졌던 걸까.

아니면, 최강 대국 미국의 군인으로서 베트남에 패전한, 전쟁 트라우마일까. 전쟁에 사용한 총기를 수집하는 걸로 평생을 바치고 사셨던 게.

누구도 그에게 정확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6.25 전쟁에 징집군인이 되어 실제로 총을 쏴보고 맞아본 아버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평생 안고 사셨다.

아버지는 한국 전쟁을 회상할 때면, 3년간 공짜로 국토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미화했다.

북한을 포함한 국토의 대부분을 밟아 보며, 죽음의 위기, 추위와 굶주림, 포로로 잡혔던 기억 속에서.

“그해 보급품이 끊겨 배 많이 곯았지. 썩어서 구린내 나는 감자를 주워 먹어도 배탈 한 번 안 났지. 맨몸으로 눈밭을 뒹굴어도 동상이 다 뭐냐. 열이 펄펄 났는데...”

아버지는 당신이 겪은 참담했던 상황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어서 반대급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했던 걸까.

나는 아버지가 육신의 통각이 무감각하다고 여겼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마흔을 훌쩍 넘긴 연세였다. 늙어가는 모습만 봐서인지 노화 현상인 줄 알았다.

뇌 질환을 오래도록 앓았던 것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걸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오래 사셨다. 함께 전쟁에 나갔던 동기들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살아남은 것에 죄의식 같은 '생존 증후군'을 품고 산다고 한다.

아버지는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전투지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다.

90대에 인지 장애가 오신 뒤로는 과거의 기억, 꿈에서 만난 전우들, 전쟁 이야기만 하셨다.

남자 간병인이 아버지에게 군번을 물었던 적이 있다. 왜냐하면 전쟁 군인에게 군번은 생명줄 같아서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 말에 눈물이 났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준비가 되었는데...

아버지는 3년 전, 가족 곁을 떠나셨다.

군번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평안하시길.


한국 전쟁이 정전된 지도 75년이 되었다.

전쟁은 지금도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도 여전히 생존 자체가 전쟁인 현재를 살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는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 개인의 삶을 존중하지 않았고.

전쟁으로 인한 상흔은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덮어버렸다.

우리가 모두 전쟁 피해자 일 수도 있지만,

전쟁에서 희생되신 분들이 꿈꾸었던 삶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번외 편


파푸아뉴기니에서 딕의 이야기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던 1942년에서 1943년 사이 파푸아뉴기니의 어느 밀림 지역에서 미국 군인 딕은 동료 병사 칼과 함께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밀림 깊숙이 들어오자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던 중 매복하고 있던 일본 군인에게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나무 뒤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딕과 칼에게 돌진했다. 그는 한 손에는 사무라이 칼과 다른 손에는 남부 권총(Nambu pistol)이 들려 있었다. 일본군은 칼에게 총을 쏘았다. 칼이 쓰러지자 곧바로 딕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남부 권총은 잦은 고장으로 악명 높다고 한다. 남부 권총의 치명적인 하자가 딕이 위기일발에서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때 총에 맞아서 바닥에 쓰러져 있던 칼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일본군을 향해 정신없이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딕은 동료 칼을 응급처치한 뒤, 일본군의 몸수색에 들어갔다. 죽은 일본군은 젊은 고위 장교였다. 그것도 특수 정예 해병대(Special Naval Landing Forces, 흔히 ‘제국 해병’으로 불림)

제국 해병은 자신의 용맹함을 과시하려고, 부하들을 대동하지 않고 독단적인 행동을 일삼는다고 한다.


일본 장교를 몸수색해서 나온 유품은 다음과 같다.

남부 권총과 대검, 개인 소지품이 담긴 작은 주머니가 있었다. 그 안에는 편지들과 작은 종이쪽지들, 비단 주머니에는 아내의 사진, 그리고 전투 깃발 등이다.


딕과 칼은 그 전리품을 나눠 가졌다.


딕은 세월이 흘러 총 동호회에서 만난 동생의 시아버지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었다.

딕은 전쟁 군인으로 적을 처단하고 그의 소지품을 약탈하는 건 당연하게 여겼다. 적국의 고위급 장교라서 가치 있는 전리품이라 여겼을 것이다.

딕이 생을 마감하기 전, 그가 일본 장교에게 취한 유품을 사돈어른에 건넸다. 그가 소중히 간직할 줄 알았던 거다. 딕은 단순히 무용담으로 써먹을 전리품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돈어른은 일본군의 유품을 오래도록 보관하다가 그가 병석에 계실 때 동생에게 남부 권총(Nambu pistol)과, 거기에 담긴 스토리도 함께 물려주었다. 한국인 며느리가 더 의미 있게 간직해 주리라 믿었던 모양이다.


동생은 일본 장교의 총을 처분하고 싶지만, 거기에 딸려온 편지와 앳된 얼굴의 여자 사진을 보자 비록 전범국가의 군인이지만, 그에게도 가족과 아내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했다. 버리지도 못하는 짐을 떠안았다.


태평양 전쟁 때 파푸아뉴기니에서 죽은 일본 장교의 소지품이 80년을 넘어서 동생에게 오게 된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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