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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Mar 25. 2024

피아노

제18회 생활문예대상 입선작

매주 월요일을 발행일로 정했다. 그날이 와 버렸다. 작가 승인받고 3주 차 들어갔으니 세 번째 글이다. 습관이 돼야 꾸준히 하겠다 싶어 뭐라도 올리려고 하는데, 작가 신청할 때 제출했던 글을 한번 올려 보려고 한다. 이 글로 일주일을 버틸 수 있겠군. 흐흐. 날로 먹는 것 같은 기분.


나는 '추억은 솜사탕 같아',  부제 '정의 여섯 살 인생'이라는 연재를 나름 구상하고 있다. 나의 오랜, 소중한 한 시절이  왜곡되지 않게, 그리고 희화화되지는 않되 가능한 재미있게, 솜사탕 같이 가볍지만 의미가 꽉 들어차게,,, 그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다 보니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일단 노력은 해 보려 한다. 앨범을 꺼내 사진도 몇 장 찍어 놓았다. 순서도 정해 놨다. 제목도. 이제 내용만 넣으면 되겠다. 요리를 하듯 열심히 만들어서 한 상 차려 보겠다.


아시죠? 요리는 늘 맛있는 건 아닙니다^^




'피아노'는 작년에 좋은 생각에서 주최한 제18회

생활문예대상에서 입선을 수상한 작품이다. 상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명작가에게도 인생작이 있다면 내게 그것은 이 글이 될 것이다. 내 삶을 관통하는 가장 큰 힘이 무엇인지, 나 자신도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러기에 조금은 부족해도, 겸연쩍어도 한번 올려 보고자 한다.




피아노



어린 시절에는 피아노가 있는 집이 흔하지 않았다. 생활하기에도 빠듯하니 엄두를 못 냈다. 그러기에 피아노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내게도 그랬다. 머리를 곱게 땋고 예쁜 원피스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 피아노를 치는 드라마 속 소녀의 모습을 나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만큼은 우리집에도 피아노가 있었다. 하도 꿈을 꾸니 꿈에서도 꿈인지 생시인지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작은오빠에게 볼을 세게 꼬집어 달라고 한다. 봐주는 건 없다. 눈물 나도록 아픈 걸 보니 이번엔 진짜라고 둘이서 펄쩍 뛰며 좋아한다. 그렇게 뛰다가 역시나 꿈에서 깨어 버리는 거다.


지방 회사 만년 계장이셨던 아버지 월급으로 자식 셋을 공부시키려면 아껴 쓰고 저축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던 때다. 많지 않은 월급의 반토막을 저축하고도 살림을 유지하시던 엄마. 그 알뜰함으로 큰오빠가 고등학교 1학년, 막내인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던 해 우리는 15평짜리 우리집을 갖게 되었다. 남의 집을 무수히 옮겨 다니던 생활도 끝이 났다. 이사 온 날 우리 다섯 식구는 창 밖의 별만큼이나 반짝이는 우리들의 새로운 앞날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있어 딸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피아노를 사줄 그날은 여전히 아득한 날이었다.

6학년인 내게는 라이벌 친구가 있었다. 예쁘고 키가 큰 그 친구를 남자 애들은 졸졸 따라다녔다. 인기는 없었어도 내겐 꿀리지 않는 게 있었다. 월례고사에서 친구에게 한 번도 1등을 뺏기지 않은 것, 친구는 우리보다 조금 더 작은 13평에 산다는 것.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놀랍게도 친구의 방에 번쩍번쩍 윤이 나는 검정색 피아노가 있었다. 친구는 능숙한 솜씨로 소나티네를 쳐 주었다. 그 어떤 드라마에서의 장면 보다도 그 모습은 더욱 예쁘고 눈부셨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던 거였다.


집에 돌아온 내가 몰래 훌쩍이고 있을 때 엄마가 들어오셨다.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해버리고 말았다. 강하고 굳세기만 하던 엄마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셨다. 가여울 만치 엉엉 우셨다. 그 소리에 큰오빠가 들어왔다.

"내가 커서 돈 벌면 너 피아노부터 사줄 거야."

그게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세 사람은 함께 울었다.


그렇게 간절했던 많은 날들은 엄마가 깨알 같이 적던 가계부처럼 차곡차곡 쌓여 갔다.

내게도 드디어 피아노를 사는 날이 왔다.

고3, 학력고사를 마치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대우로얄피아노 가게로 가셨다. 아버지가 의기양양하게 말하셨다.

"우리 딸 곧 대학 갈 건데 제일 좋은 거로 보여 주이소!"

꿈속에만 존재하던 피아노가 우리집 작은 거실에 들어왔다. 할부값이 얼마인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께도 딸에게 피아노를 안기는 그날이 찾아온 것이다.


피아노를 따로 배운 적은 없어도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만큼은 꽤 잘 쳤다. 지겨울 법도 한데 치고 또 쳤다. 내게도 피아노가 생기면 원 없이 쳐 보리라 생각했던 곡이다. 그 곡을 들으며 엄마는 밥을 준비하시고 아버지는 화분에 물을 주며 흥얼거리셨다. 두 사람의 관객 앞에서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연주자였다.

세월은 쏜살 같이 흘렀다.

2019년의 마지막 날에 아버지는 주무시듯 편히 잠드셨다. 1년 반 뒤에 엄마는 병실에서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2박 3일을 함께 하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엄마의 메마른 입술에 약을 발라 드리려고 손가락을 댄 그때 심박동이 0을 가리켰다. 아직 손끝엔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는데도.


엄마를 보내 드리고 뒤돌아서 본 세상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곳처럼 낯설고 텅 비어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열지 않는다. 아드린느를 잃은 연주자는 더 이상 아드린느를 위해 연주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도 나도 치지 않는 피아노지만 처분하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강력히 반대했다.


어쩌면 내게 피아노는 악기가 아닌지도 모른다. 예쁜 딸, 착한 동생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파 온 가족이 함께 간절했던, 그랬다. 피아노는 사랑이었다, 모두의 꿈이었다.

내게 소중한 것을 남겨 주신 부모님, 인생의 선율은 악기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이 모여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꼬리별 하나가 그리운 아드린느를 찾아 외로이 맴돌고 있는 까만 밤하늘.

보고 싶은 아버지 어머니, 지금 어디쯤에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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