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니면서 받는 급여는 나의 시간에 대한 기회비용이라 했다. 시간적 여유를 상실하는 대신 급여로 그걸 돌려받는 건데 늘 그 비용은 너무 싸다. 나의 시간의 가치는 왜 그것밖에 안되는가.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라고 나는 늘 생각하기에 회사를 다니는 순간들은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돌이켜 보면 일을 시작할 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듯 하다. 사회복지관에서 자원봉사 했던 기억이 좋아 시작한 사회복지사 일은 양이 많고 늘 시간이 없었다. 대상자를 상대하고 전화를 받고 하다 보면 네 시 다섯 시였고 행정서류 정리를 하다 보면 일곱 시 여덟 시는 금방이었다. 그래도 함께 일했던 20대 사회복지사들 간 유대감을 갖고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가치를 가져 가며 재밌게 일했는데 5년차가 되니 현타가 왔다.
평가를 위한 행정서류 정리와 연간 열 개씩 써대는 프로포절은 퇴근시간이 새벽에까지 도달하게 했다. 샤워만 하고 출근하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워라벨을 찾겠다며 행정기관을 찾아 면접을 보러 다녔다. 사무실에서만 일하는 대가는 5년차 연봉에서 3년차로 내려가는 거였다. 그럼에도 9 to 6를 위해 이직을 감수했다. 급여는 낮아져도 마음은 편했다. 퇴근 후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하고 싶었던 공부들도 하고 사람들도 만났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와 함께 하다가 복직을 하고 나서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혔다. 열이 난다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토했다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눈치가 보이고 연차가 깎였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재택근무가 일부 허용됐으나 일하다가도 어린이집 반에 확진자가 생기면 바로 퇴근해야 했다. 주에 한 두번은 야근이 필요했다. 신랑은 등원을 나는 하원을 담당했는데 야근을 할 때엔 그나마 가까운 엄마와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다.
행정기관은 공공기관이 되어 새로 도입되는 것도 많고 새로운 것도 많았다. 승진을 했다. 일은 더 많아지고 야근은 더 잦아졌다. 야근이 어려워 조근을 했다. 6시 반에 출근해서 남은 일을 했다. 야근수당은 한정이 있었다. 야근시간은 한정이 없었다. 수당 없이 일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러다 인천으로 이사오며 휴직을 했다. 나의 시간을 다시 찾았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이제는 좀 큰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신랑은 시간을 찾지 못했다. 이직한 회사는 새벽에도 집에서 일해야 하는 분위기다. 시간이 중요한 우리에겐 회사가 요구하는 시간이 너무 어렵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