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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Jun 07. 2024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노란 쪽지를 쓰다

담백하고 은은하게, 부담이고 싶진 않으니까


 근무지에서 애플스토어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두 시간이 걸린다. 나는 쪽지를 건네고 다시 근무지로 돌아와야 했고 그럼 왕복 최소 4시간의 수고를 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했다.

장학 수업 전날이었고 준비를 잘했어도 수업 공개를 앞두고 그 먼 길을 다녀오는 선택은 아무래도 어딘가 좀 과감한 것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이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더 늦어지면 내 안의 용기도, 확신도 상대의 반응도 어딘가 조금 아쉬워질 것 같았다. 이미 일주일이 훌쩍 넘었고 그 사람은 나를 기억하지도 못할 텐데 설사 기억한다 해도 이미 까먹고도 남을 시간이고 너무 뜬금없는 등장일 텐데. 그래서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바쁘다는 핑계, 멀다는 핑계를 대며 그 부끄러움을 견디는, 쪽지를 건네는 순간을 유예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또 흐지부지된다면 나는 두고두고 얼마나 후회를 할까, 이랬으면 어땠을까 꽤 자주 생각을 할 테고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선택과 책임으로 얻은 결과를 견디는 고역을 치러야 할 것이었다. 그 고역을 또다시 치르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으로 나는 광역버스에 올라탔다. 


 실은 그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말근무를 하는 애플 스토어 특성상 그 사람의 근무일이 아니어서 헛걸음을 할 수도 있고 출근일이라 하더라도 근무시간이 아니면 만나지 못할 터였다. (애플스토어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이다.) 해당 지점에 전화를 해서 기술상담을 받았는데 관련해서 다시 물어볼 것이 있어 방문하려 하니 담당 직원분의 근무요일을 알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상담파트와 스토어 파트는 분리되어 있어 안내가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가도 있을지 없을지 모를 사람을, 내 안에도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그 먼 거리를 시간과 비용과 에너지를 들여서 가는 게 맞는 건지 아주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내 안에서는 가야 한다, 가게 될 것이다란 마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꼭 건네고 싶은 마음이 담긴 그래서 거기까지 가서 못 만나고 오는 건 너무 슬프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게 만들고 싶은 간절함이 담긴 고민이었다.


 도저히 혼자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누구 한 명 붙잡고 가야 이 덜덜 떨리는 긴장을 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친한 언니에게 부탁을 했다. 다들 거리가 있어 내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차마 같이 가줄게!라고 말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어서 이렇게 혼자 가는 거 아닌가 생각하다 당일이 엄마 생일이라 가주고 싶은데 못 갈 것 같다고 하는 이 언니에게 생일케이크 예쁘고 좋은 거 사야 하지 않겠냐며, 우리 동네에는 없는 비건 케이크를 사야 하는 언니의 상황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거라며 덥석 잡아끌었다. 


 그렇게 친한 언니와 스토어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혼자 두 시간의 거리를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환승하며 가는 동안 나는 오히려 차분했다. 어차피 마주하게 될 상황과 마음을 전하게 될 순간을 상상하며 피할 수 없고 일어나게 될, 삶에서 예측이 가능한 몇 안 되는 미래의 어느 지점들을 떠올리니 되려 편안해지고 차분해지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떨림과 긴장에 아주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 떨림과 긴장 속에서 용기를 내어 마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 내가 되는 것이야말로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아 오히려 기대되고 기분이 좋았다. 그걸 하고 난 후의 나는 또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될지 기대가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건네줄 쪽지를 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써야 할지 알겠는데 또 솔직히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게 된 건 처음이라 이 낯설고 새로우며 처음인 감정을 어떤 단어와 온도로 꺼내 보여야 할지 생경했다. 그 생경함에, 또 묵은 피로에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꾸벅꾸벅 졸았다. 어쩐지 마음이 편안했고 동시에 사르르 떨렸고 그러면서 괜찮았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환승을 하고 다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혼자 좋아하는 것을 하다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약속한 5시에 맞춰 애플 스토어에 도착했다. 이제는 실전이었다. 예견된 만남과 상황 앞에서 예측되는 나의 언어와 행동이 이제는 진짜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행하여 내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나는 나를 뚫고 올라오는 긴장을 나에 대한 믿음과 자신과 용기와 이 상황 자체를 즐기게 되는 내면의 힘으로 누르며 어쩐지 못 견디겠으면서도 내심 살랑이는 마음으로 묵묵히 애플 스토어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건 뭔가 꽝꽝 얼음도 아니고 활짝 녹아버린 물도 아니고 사각거리는 슬러시 같이 얼었는데 녹고 있는 한가운데의 상태인 마음이다.



 쪽지는 애플 스토어에 도착하기 4 정거장 전에 썼다.

내가 지금 덜컹이는 마을버스 안에서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초여름의 오후 5시에 

사무실에서 챙겨 나온 노란 포스트잇을 책을 받침 삼아 나를 소개하는 문장과 연락처를 적고 있다니  

너무 웃기고 귀엽고 놀라운 것이다.


 아직은 나도 이 사람이 좋은 게 아니고 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에너지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게 하니까 그래서 밖에서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니까 담백하게 

그러나 그냥 한 번 들이대보는 거 아니고 나름 신중하고 진지하게 내 진심을 담뿍 전하는 거니까

그런 마음은 느껴졌으면 해서 은은하게

계속 생각나서 이렇게 다시 오게 됐다고, 부담은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고,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길 바란다고

그렇게 내 마음을 적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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