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치고 빠지기
쪽지를 건넨 사람에게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연락이 오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날 한 시간 반을 애플 스토어에 있었고
중간에 그를 붙잡아 궁금한 것을 물었으나 결국 쪽지는 직접 전해주지 못했다.
그 찰나 나는 예감했다. 내가 쪽지를 건네도 상대로부터 응답이 오지 않겠음을.
나는 내 몫을 다하는 게 중요했다.
두 시간을 달려 와서 한 시간 반을 매장에서 그를 기다리며 나는 이미 진이 다 빠졌고 긴장으로 정신은 애초에 하나도 없었으며, 용기를 끝까지 다해 내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서 있던 참이었다.
그는 테크니션 파트에서 근무를 하는 사람이라 매장 내에 상주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호기롭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는 없었고 나는 여기까지 왔는데 오늘 못 만나고 가는 건 아닌가 싶어 잠시 절망했다. 일단 안쪽 사무실에 있을 수 있으니 조금 기다려보자는 마음으로 매대 앞에 서 있다가 일단 오늘이 그의 출근일인지 확인부터 하자 싶었다. 전화로 문의했을 때는 유선으로 안내는 어렵지만 매장 방문 시 해당 직원이 없다면 언제 방문하면 되는지 알려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장 처음 우리를 맞이해 준 직원 분께 가서 지난번에 기술상담을 받았던 직원 분께 상담 관련해서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계신지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상담 관련 문의사항이 있다는 건 진짜다!)
직원 분은 어떤 일로 찾는지 상세하게 물었고 나는 당시 상담내용을 기반으로 추후 결정해서 다시 방문해야 할 상황에 대해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분이 아니어도 다른 누구라도 응대할 수 있으며 그분이 매장에 있는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하셨다. 유선으로 안내받은 답변과 너무 다른 상황에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고, 일단 그가 나타나기를 무작정 기다려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내 편인가 얼마지 않아 그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를 보자마자 나는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발에 모래주머니를 수백 개는 찬 것 같은, 아니 그냥 원래부터 내 발은 땅바닥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것처럼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나는 다급하게 친구에게 속삭였다.
"나왔어! 나왔어! 근데 몸이 안 움직여!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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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그 사람을 보자마자 한 첫마디는 이거였다.
"야! 홍합머리인데!"
그렇다. 그 사람은 조금 개성이 있는 스타일이었고, 자기만의 바이브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5:5 가르마에 정수리부터 옆머리를 타고 볼 언저리까지 머리카락이 바짝 붙은 홍합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저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마치 '현규의 홍합머리'의 새로운 버전 같았다.
일단 나는 살짝 망설여졌고 이번 방문의 목적은 쪽지를 주기 전 '내 마음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이었기에
한 번은 더 그 사람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다가갈 타이밍을 쟀다.
그는 나왔다가 들어가기를 수차례. 그를 붙잡을 찰나 같은 건 아무래도 없어 보였다.
일단 친구와 아이패드를 구경하며 오피스 문 앞에 자리를 잡았고 그가 나왔을 때 그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또 활짝 웃어버렸고 그 사람도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뭔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 사람이 내 뒤에 서 있을 때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드디어 용기를 내 발걸음을 뗐을 때 그는 또 문 저편으로 사라졌다. 언제 나올지 모를 사람을 우리는 힐끔힐끔 쳐다보며, 계속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직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그 큰 스토어 내부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러면서 온통 신경은 저 멀리 보이는 견고한 오피스 문을 향해 가 있었다. 막상 그가 나오면 다가가지도 못할 거면서 그렇다고 이렇게 기회만 보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건 참을 수 없어서 나는 일단 계속 나에게 움직이라고, 발을 떼라고 강하게 되뇌고 있었다.
그렇게 한 번 그를 붙잡았고 나는 궁금한 점을 물었고 그는 답하며 마지막에 자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 부분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어떻게 용기를 쥐어짜내 그를 쫓아가 붙잡은 건데 이렇게 놓칠 수는 없다 생각하며 나는 그에게 친구가 궁금해하는 제품 설명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해당 제품 담당 직원에게 이관하고 다시 떠나버렸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지금 잡아야 한다 이 사람을.
실은 상담을 목적으로 온 게 아니라
당신이 궁금해서 한 번 더 보고 싶어 왔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고.
홍합머리에다 주름도 조금 많아 나이가 가늠되지 않는 이 사람이,
한 번 더 마주봐도 계속 궁금해 결국 쪽지를 건네주고 싶다는 마음을 확인했으니
나는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고, 오른쪽 호주머니에 깊이 놓아둔 그 노란 쪽지를 꺼내어 이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에게 그 타이밍은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게 또 그 사람을 놓쳐 버렸다.
이미 한 시간이 넘게 흘렀고 나는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몸이 녹아내리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철퍼덕 바닥에 앉아 어딘가 기대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큰 용기를 내서 이만큼 버티고 있었으면서, 마지막 딱 한 번의 용기를 못 내서 이대로 집에 가면 지하철을 타는 순간 후회할 것 같았다. 나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딱 10분만 더 있어보자고, 그 안에 그 사람이 다시는 안 나오면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가자고, 만약 나오면 그때는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사람을 쫓아가 쪽지를 주고 나오자고.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그 사람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마지막 5분만 더! 를 외치며 긴장과 신경으로 녹진해져버린 몸을 부여잡으며 서 있었다. 12분째에 그 사람은 나왔고 나는 곧장 그 사람에게 달려갔으나 그 사람은 또 들어가 버렸다. 무슨 시간제한 내에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사람처럼 바람처럼 휙 나왔다가 다시 바람처럼 쏜살같이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이제 다른 방도가 없었다.
계속 이렇게 그를 기다리고, 쫓아갔다가 놓치고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나는 새로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