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와 최선이 오해와 여지가 되지 않게
그날 그는 자신은 오해가 풀렸으니 괜찮다고 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다음 주 약속날에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전화를 끝으로 우리는 약속날까지 연락을 하지 않을 거고, 약속 자체도 없어질 터였다.
그러니까 그건 관계가 아주 이상하게 끝나버리는 것이었다. 연락이 끊기는 것도, 약속이 엎어지는 것도 다 괜찮았다. 나는 관계가 어떤 걸로도 규정되지 못한 채 애매하게 끝나는 게, 마냥 불편하게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끝나는 게 싫었다.
친구면 깔끔하게 내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친구로 끝내고 싶었고, 여지가 남아 있으면 대화를 하고 그 향방을 정하고 싶었다. 그렇게 더 가봐도 아니면 그때 끝을 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 나는 공격을 받았고, 쓸데없는 사과를 했고, 이 고백 아닌 고백, 호감 아닌 호감표현을 들어놓고, 내가 애써 잘 풀어보기 위해 한 대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전화를 끊으면, 나는 제대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나의 불쾌함과 사과받아야 하는 행동의 근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내 안의 모호함과 갑갑함으로만 남긴 채 그러면서 상대 앞에서는 어색해야 하고 또 본인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떳떳하게 해맑은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으니까.
나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오해가 풀려서 본인은 이제 괜찮다는 그 친구의 말을 다 믿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끝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나는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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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예측할 수 있는 만남의 시간만 정하고 우리는 어디서, 언제, 어떻게 볼지 아무것도 약속된 게 없이 통화를 끝냈다. 이른 오후였고 해가 저물어 깜깜한 저녁이 찾아올 때까지 그 친구에게서는 메시지 하나 없었다.
그때도 이 사람은 자신의 감정 뒤로 숨는 사람이었다. 괜찮지 않으면서 끝까지 자존심만 세우는, 비겁하고 어린아이 같은 감정의 소유자였다.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어떻게 관계의 불편함과 갈등을 풀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그동안 편한 관계만 추구해 온 사람이었다. 관계의 어려움을, 감정과 생각과 의견의 차이를 대화로 나누는 것을 늘 회피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결국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솔직히 나조차도 이런 사람 앞에서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을 시작해서 어떤 대화로 이 서사를 풀어가야 하는지 아득했다. 머리가 아팠다.
왜, 어쩌다, 한 순간에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정작 일을 이렇게 만든 건 상대인데 나는 내 자리에서 홀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애써야 했다.
외롭게, 가엾게, 힘들게.
정답은 없으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나의 스타일로 하라는 친한 동생의 말을 계속 떠올렸다.
방법도, 정답도 하나도 모르겠고 내 삶에 나에게 이렇게 무책임하게 감정을 던지고 간 사람은 그 말고도 몇 명 있었지만 이 정도는 처음이었기에 나조차도 이 상대가 너무 어려웠고, 게다가 나에겐 일종의 공포감까지 스며들었으니 이건 내게 생애 처음 맞닥뜨리는 갈등이었다. 그래서 그냥 나의 방식으로 다가가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그 메시지에 처음 연락을 하게 된 상황부터 산책을 하며 나누었던 대화들,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감정과 혼란, 그러다 오늘 아침에 받은 문자 속 너의 감정에 대한 나의 기분과 생각, 그 모든 흐름에서 네가 가지고 다가왔을 너의 감정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적었다.
내가 파악한 이 친구와 이 친구를 아주 오래 알아온 지인의 말을 통해서라면 이 친구는 이렇게 해야만 만나서 어떤 대화든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설사 그걸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 나는 마음 편히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을 터였다.
마지막에 결국 또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내가 있었고, 위의 내용에는 또 어떤 대답도 없이 약속장소에 대한 아주 딱딱한 말투의 답만이 도착해 있는 대화창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투명할 일인가. 이 투명함은 이제는 상대에게 최소한의 예의조차 차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뭘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그냥, 계속, 나만, 노력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상대는 감정적 배려라는 걸 애써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꾸만 거대해지는 본인의 감정과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그걸 그대로 내비치는 사람이란 사실이,
본인의 솔직한 감정을 적절히 다루며 이성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꾸만 보였다.
속상하고 상처받고 무서운 감정을 숨긴 채 아무렇지 않게 계속 전처럼 말하고 답하는,
홀로 이 관계를 잘 매듭지으려 애써 밝게 노력하는 건 오직 나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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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 사람과 나는 만나서 3시간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버거웠다. 처음 인사를 건네고 말을 띄우는 것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노력도,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스몰토크로 대화의 단계를 쌓아가는 것도 다 내가 했다. 나 혼자, 나만 열심히 이 묵직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저녁 일정은 잘 마무리했는지, 어땠는지, 이런 대화를 하는 걸 평소에 어려워하는지 등 분위기를 애써 풀어보려 하고, 정말 해야 할 이야기를 하기 위해 대화의 온도와 레이어를 쌓아나가는 질문까지, 그래서 결국 마주해야 할 진짜 감정들에 대한 질문까지. 모두 다 내가 했다. 너의 감정은 어떤지, 이제 괜찮은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내 마음은 어때 왔는지, 그래서 지금 나는 너에 대해 어떤 감정이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든 문장의 시작과 끝에는 내가 있었다.
이런 걸 대화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사람 앞에서 어떻게 자기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지 몰라 자꾸만 숨어버리는 어린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도 된다고 달래며 자기감정을 알맞게 표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상대의 성향에 맞춰 질문을 골라 물어봐주는 부모가 된 기분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지나고 나니 나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할 때 행복한지, 싫어하는 건 뭔지, 평소에 삶을 어떤 걸로 채우는지, 갈등이 있을 때 의견과 생각을 어떻게 전달하는 사람인지 그런 건 하나도 모르는데, 게다가 이성으로 시작한 관계가 아니었고 그냥 밥 한 번 먹자고 시작된 연락이었는데, 서로를 알게 된 지 일주일도 안되었는데, 너도 확신이 아닌 호기심과 궁금함이었고 나조차도 친구로서 다가가던 참인데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천천히 알아보며 각자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자고 그러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너도 네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을 때 그때 네 감정을 다시 말해달라고, 나도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이 어떻게 바뀔지 살펴볼 거라고, 나는 이제부터 시작될 이 관계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남자친구처럼 구는 이 친구가 있었고, 아무리 남자친구라도 불편함을 느낄 말을 하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그게 못 견디게 힘들었고 싫었다.
3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깨달았다. 이미 이 관계는 끝났음을, 동시에 내 마음도 끝이 났음을, 나는 그와 친구조차 될 수 없음을 아니 친구로도 지내기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지쳤고 이미 이성적 감정은 끝이 났고 그냥 사람으로서도 이 친구에 대한 어떤 마음도, 감정도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고 지친 하루였다.
앞으로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 이 감정이 어떤 항로로 향할지 지켜보기로 했으니까, 천천히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가 보자고 했으니까, 그런 지친 상태에서도 나는 무의식에서 울려오는 이미 끝이 났다는 신호보다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을 따랐고 솔직히 이미 상대에게 정서적으로, 행동적으로 나보다 그의 의사를 고려하며 맞춰주게 되었단 걸 인정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채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네가 이성적으로 느껴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