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아는 척 안 하려고 했는데
"앞으로 아는 척 안 하려고 했는데"
나는 이 문장에 어떤 대답을 했어야 했을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을까.
어떻게 대응해야 했을까.
끝이 나고 나서야 오래 곱씹어 보았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상대의 마음을 알아주고 감정을 헤아려주는데 급했을까.
왜 나는 없었을까. 저 문장에 대한 나의 감정을 살피지 못하고,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지 못하고 이 관계를 어떻게든 잘 봉합하려고만 했을까.
거기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사람과 나는 같은 집단에서 계속 마주해야 하는 관계였다.
이 관계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갈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어떤 방향이든 불편함 없이, 어색함 없이 잘 끝내는 게 중요했다. 계속 얼굴을 봐야 하니까, 일을 같이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피할 수 없이 함께 하게 될 상황에서 나는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무자비한 문자를 받고 나는 당황했고 무서웠고 옅은 불쾌함까지 피어올랐지만 그 함부로 대해진 나 자신을, 짓밟힌 내 감정을 보다 선명히 바라보지 못하고 상대의 감정을 타이르는데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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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람에게 그 문장의 의미가 장난인지 진심인지 물었다.
이 사람은 장난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왜 미안한지도 모르겠는데, 미안할 일이 전혀 아니란 걸 알았는데도,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이 친구의 저 대답이 진심이라고 해도 나에게 왜 본인의 감정을 쏟아내는지, 함부로 나를 대하는지 따져 물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장난이라고 해도 나에게 그런 장난을 왜 치는지, 우리는 그런 장난을 해도 되는 사이가 아니며 설사 우리가 가까워졌다 해도 내게 그런 장난을 쳐서는 안 됨을, 그건 내게 불쾌하고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임을 분명히 주지 시켜야 했다. 나는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고작 세 시간이었는데.
왜 세 시간 만에야 답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렇게까지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걸 무의식 중에 알면서도 내 상황을 설명하며 납득을 구하고 있었다.
우선 그 문자의 워딩이 나에게 너무 폭력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치감찌 심리적 압박감이 몰아쳤고 정서적 위축감이 상당했다. 거기에 평소 타인의 감정을 잘 살피고 헤아리는 성향과 직업적 감내와 품는 태도까지 더해져 나는 이 사람의 엄마도, 선생님도, 그 무엇도 아닌데 엄마가 어린아이 달래듯 이 친구를 달래고 타이르고 헤아리며, 감정을 묻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끌어내며, 때때로 해명 아닌 해명, 화해 아닌 화해를 말하고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나도 이 관계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대화 중간중간 느껴지는 나에 대한 이 친구의 호감에 나도 이 친구에게 이성적인 감정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고 있었던 찰나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가보고 싶었고 그래서 먼저 연락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이 모든 마음들이 한데 얽혀 그 순간에 어쩌면 나는 이 관계를 애써 꿰매고 봉합하여 한 번은 더 이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그렇게까지 내가 매일 필요는 없었는데, 오히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시작도 전에 알게 되어 도망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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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화를 했다. 문자로는 다 전해지지 않을 숨겨진 마음이 있을 테니 전화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정말 바빴던 내 상황을 설명했고 미안하다고 다시 한번 전했다.
상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도 밀당 싫어한다고 하면서 다른 여자들이랑 똑같이 밀당하는 거 아니야?"
나는 지금 내가 들은 이 말이 이 순간에, 이 지점에서, 너와 나 사이에서 튀어나올 말이 맞는지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니 황당했다. 또 굉장히 불쾌했다.
그러니까 나는 몹시 기분이 나빴다.
연락을 하면서도 이상한 포인트에서 밀당 드립을 하길래 이건 뭐지 싶었던 때가 있었고, 이 친구의 몇몇 문자처럼 잘 넘어가기 위해 장난으로 애써 여기며 다음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는 연락을 한지 아니 알게 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고, 연락한 일수가 중요한 게 아니어도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걸 확인한 다음에 이어지는 연락도 아니었고 정말 그냥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환경이었는데 오히려 긴가민가 헷갈리게 하는 상황에서 나보고 밀당한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이 사람의 화법이, 내가 본인을 자꾸만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는 표현들이 너무 화가 났다.
도대체 어떤 사고를 품고 있는 사람인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생각을 하면 내게 그런 무자비한 말을 해놓고는 정작 본인의 사과의 필요성에 대해 단 한 번도 재고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에게 그런 말을 하며 사과받기를 원할 수 있는 건지 지금에서야 나는 이 엄습하는 어두움을 감각한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너는 그럼 나에게 왜 그런 문자를 보냈느냐고.
내가 아침에 새로운 연락을 안 해서 왜 서운한 마음이 들었냐고.
왜 시무룩했냐고.
그러자 비겁하고 용기 없는 그는,
나에게 밀당 어쩌고 저쩌고 말은 하면서 본인의 감정과 마음은 단 한 번도, 이 순간에서조차, 확실하고 선명하게 밝히지 못하는 도망치기 바쁜 어리석은 사람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게.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네.
이때 끝냈어야 했다. 단호하게, 확실하게.
네가 나에게 한 실수가 무엇인지 명확하고 여실히 알려주면서.
다시는 나에게 두 번 다시 함부로 하지 말라고.
본인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면서 관계의 어긋남을 상대의 태도로 돌리는 당신의 비겁함에 대해 알려주면서.
상대의 감정선이나 마음은 헤아리지 않으면서
본인이 낸 용기, 본인만 아는 마음의 크기와 속도만 생각하고 아니다 싶으니까 폭탄처럼 자기감정 던지고 도망가기 바쁜 너에 대해.
정작 상대를 나쁜 사람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그런 너의 화법과 태도에 대해 적시해 주며
네가 잘못한 거라고,
나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되었다며 말해야 했다.
나는 너조차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면서 나에게 왜 밀당 운운하며 책망하듯이 말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세 번 만에야 그는 대답했다.
뭐.. 친구 이상의 감정이니까 계속 연락한 거라고
끝으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목소리로,
완전한 어미로 끝맺지 않은 불완전한 문장으로.
그때 그렇게 끝내야 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 없이 용기 없는 사람이었다.
내게 그런 말을 내뱉고 세 번 만에야 우물쭈물 자신의 마음을 희미하게 말하는,
차라리 그때 실은 내가 너에 대해 호감의 마음이 있어서 연락한 거였고, 그래서 내가 그렇게 무례한 말을 속상한 마음에 내뱉어버렸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그렇게 내내 비겁하다 마지막에 확실하게 용기 있었다면 어쩌면 이렇게 힘들지 않게 관계를 적당한 때 찬찬히 마무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