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이미지의 꺼풀을 벗겨내고 온전히 바라보기
가끔 그를 보게 되는 날에 문득 그가 눈에 들어오는 날이 있었고, 그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날도 있었고, 그가 보여도 시선이 가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러니까 딱 그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와 느낌이었지만 나는 그를 모르니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 삶이 바빴고 신경 써야 할 것 투성이었고 지금 내 눈앞에 넘어야 할 산들이 매일같이 쏟아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런 호감이나 눈에 들어왔던 순간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궁금해 알아보고 싶어지고, 사랑이 싹트고, 그와 연애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가끔 그가 오랜만에 보일 때면 종종 눈길이 가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한 번씩 마음이 일렁이곤 했지만 금세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다 그가 점점 눈에 들어오고 마음이 가는 초여름에 어쩌다 그와 함께 밥을 먹을 자리가 생겼다.
그때 그를 좀 알아봐야지 생각했었다. 내 마음도 확인하고.
가까이에서 그를 봤을 때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도 처음이었고 얼굴을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가까이에서 본 그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안경을 쓴 모습도, 안경 너머의 얼굴도 다 새로웠다.
그 모습이 좋고 싫고를 떠나서, 개인적 선호에 영향을 주는 걸 떠나서
말로는 이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백지상태라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 사람과의 첫 순간에서 느낀 감정, 인상, 기억이 이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멀리서 문득문득 그를 봤을 때 내가 느끼던 분위기나 인상이 만들어낸, 그때 무대 앞에서 눈을 마주치며 내가 받은 첫 느낌이 만들어낸 일종의 나만의 그에 대한 배경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얼굴과 다른 사람 같았다.
어딘가 긴장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다고 그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냥 그가 내 앞에서 어떤 프레임에서 벗어나 온전한 그로 존재하게 된 순간, 완전한 자신으로 나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인간적으로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지 않고 긴장하지 않고 나도 나 자체로 다가가 관계를 맺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 편안함 같은 것이었다.
주변에서 그가 사람을 잘 챙기는 걸로, 착한 사람인 걸로 무수히 많은 말을 들었다.
진지하고 착한데 조금 재미없는 주변을 잘 챙기는 사람.
소문대로 그는 주변을 잘 챙겼다. 그런데 너무 챙겨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혼자 분주하게 이쪽저쪽을 횡단하며 본인은 밥을 먹는 건지 알아차릴 수도 없이 계속 움직이며 상황을 살피고 사람들을 챙기고 부수적인 재료들을 준비하고 날랐다.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물어볼 틈도 하나 없이 그는 끊임없이 분주했다.
그리고 어딘가 바보처럼 앉아 있다가 말하고 웃었다.
어쩐지 나는 그 모습이 내가 봤던 사람,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그랑 어딘가 조금 동떨어진 모습이라고 느껴졌다.
그게 원래 그 사람 모습이었다는 걸 안다. 그저 내가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서 프레임을 씌운 것이었음을, 그래서 온전한 그의 모습을 마주하고 볼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상에서 벗어나 환상에서 벗어나 진짜 그 사람을 보고 그다음에 좋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이 사람을 아는 어떤 이는 이 사람이 털털하고 덜렁이는 훈장님처럼 말한다고 했고, 어떤 이는 엄청 진지하다고 했고, 어떤 이는 주변을 너무 챙겨서 정신이 없을 거라 했고, 어떤 이는 그렇게 착한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 모든 말을 총합해 보면 내가 그날 본 그의 모습이 맞을 것 같다.
그는 빙구 같으면서 진지하고, 또 너무 정신없고 분주하다가 그 모든 게 그 사람의 성실과 선함에서 비롯되는 그냥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날 기대했던 것만큼 그가 궁금하지 않았고 어딘가 예상외의 모습에 좀 깼던 것 같기도 하며 그래서 긴장도 설렘도 다 눈 녹듯 사라졌다가 그를 향한 작은 호기심만큼은 계속 살아있었고 그 앞에서 편안한 나를 느끼며 내가 이 사람 앞에서 버벅댈 일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게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래서 혼자 자리를 정리하며 젓가락을 다 떨어뜨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줍고 있는 이 사람을 보고는 같이 앉아 젓가락을 주웠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계속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정신없이 젓가락을 줍고, 주운 젓가락을 계속 다시 떨어뜨리며 꽤 많이 급해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천천히 하세요,를 연신 말하며 자꾸만 그가 떨어뜨리는 젓가락을 다시 주워줬고 비닐봉지에 서둘러 넣는 그를 마주 보고 서서 같이 비닐을 잡아주었다. 그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평소에 말할 때처럼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급하게 젓가락을 넣고 있었고 그러다 비닐봉지가 다 찢어졌고 그 틈에 끊임없이 다시 떨어지는 젓가락을 주우며 계속 '아, 감사합니다'를 말했다.
나는 정말 이렇게 정신없고 분주할 일인가 싶어 계속 그의 페이스 메이커처럼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를 말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온통 신경이 젓가락 정리에만 가 있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내리 시선은 아래의 젓가락을 향해 말도 행동도 모두 분주한 사람으로 있었다.
그리고 두 달이 흘렀고 나는 그 사이 내 생활에 집중하며 그렇다고 마음을 닫지는 않은 채 여느 때처럼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에게 얼떨결에 다가왔다가 무참한 말을 내던지고 감정적 피로를 안기고 간, 그러나 나에게 어떤 인간적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어준 사실 자체는 고마운 사람이 한 명 있었고, 내가 그로 인해 심적 부침이 너무 심할 때 갑자기 그가 내 앞에 등장한 순간이 있었다.
두 달 만에, 느닷없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렇다고 마음이 흔들렸다거나 그가 내게 큰 힘이 되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너무 오랜만에, 뜬금없이 그가 내 앞에 등장해 조금 놀랐을 뿐이고,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때 나한테 그가 한 번 더 각인된 것 같다. 아 저 사람이 저기에 있었지, 여기에 있는 사람이지 하고.
그러다 다음 주에 그가 한 번 더 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이 있었고 그에게 어떤 이성적인 감정을 가진다거나 그가 어쩔 수 없이 좋아진다거나 그런 건 하나도 아니었는데 그냥 평소처럼, 예의 그 시선처럼 그가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 주를 다시 살아내는 와중에 이 힘든 마음을 위로하고 채우고 싶어 예전에 힘이 되었던 노래의 음원을 찾아 듣게 되었다. 그 음원 속에 그의 목소리도 있었고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그 안에서 들리는 그의 힘 있고 강단 있는 목소리와 울림에 지친 몸도 마음도 많이 회복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계속 생각이 났고 떠올랐다.
이제는 그가 궁금해진 것이다.
궁금해졌다면 알아봐야 했다.
작은 용기의 첫걸음을 뗄 시간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