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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서제미 Jul 16. 2024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현실이 아닌 상상 속에 있을 때

"와, 그게 다 기억이 난다고, 신기하다, 신기해"


광주인력은행 초창기 멤버로 입사해서 3년 정도 근무 후,  이직을 한 L은 기억천재였다. 28년이 지난 걸,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던 L에게 노동부 광주인력은행은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했던 첫 직장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무조건  L에게 물었다. 기억창고인 그에게. 


1996년 7월.

우리나라 최초, 취업알선 전문기관인 인력은행이 문을 열었다. 


전국에 3군데, 서울, 대구, 광주였다. 지자체가 시설을, 노동부가 인건비와 운영비를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내 근무지는 광주인력은행이었다.

인원은 11명, 석사급 이상인 책임상담원 7명, 학사출신 일반상담원 4명이었다. 


나이대는 20대가 3명, 나머지는 30대였다. 


근무장소는 광주역인근 전남일보 건물 1층이었다.   



합격이 이후 우리는 그때 당시 인천에 있었던 노동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서울, 대구, 광주에서 선발된 책임상담원과 일반상담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첫날, 높은 학벌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내 생애 석박사급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 석박사는 기본에 유학파까지 있는 걸 보고, 학사인 내가 자꾸만 작게 느껴졌다. 


석사급이상이 3분의 2 정도였고, 그중 대다수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 경력자들이었다. 


지금처럼 석박사가 흔한 시절이 아니었다. 그때는 1996년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이렇게 학력이 높지, 아마도 대단한 일을 하려나보다는 생각을 했었다.


교육기간과 내용은 기억 속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교육 강사로 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했던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든  취업알선전문기관에서 근무할 최고의 전문가집단이니 잘해 줄거라 믿는다는 말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동기들에게 전화를 했다. 드문 드문 떠오르는 기억에 대한 회로를 찾을 수 없어서,  분명히 11명으로 시작을 했는데 1명 이름이 생각나질 않았다.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광주인력은행에서 근무할 11명 중, 1명이 교육과정 중 시험에 통과를 하지 못해 탈락이 되었다는 사실을.


교육을 받으며 친해진 우리는 출근을 하기 전에 1박 2일 자체 친목 여행을 갔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우리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미래를 도모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업무보조를 해 줄 직원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을 했던 단합대회였다.


버스를 타고 갔을까? 어떻게 거길 갔지라는 의문에 동기는 명쾌하게 대답을 해 줬다.


우리 중 차가 있었던 3명의 차에 나눠 타고 갔었다고.  차종까지 그 당시 거의 모든 걸 기억에 담고 있었다.


그만큼 첫 직장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컸을, 그 동기는 인력은행에서 근무 후 얼마되지 않아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다.  첫 직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한 채. 


그 동기가 그랬다.

개소식 전, 단합대회를 했던 그날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어떤 것인 지 모를 때,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꿈과 희망으로 넘쳐나던 그날, 기억이 가장 행복했다고.


변산반도 모항은 우리에게는 추억의 장소였다.

모항해수욕장에서 족구를 했고 밤새 술을 마셨다.


그때 구성원 중 한 명이 했던 '술은 머리로 먹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먹는다'는 그 말이 멋있어 마시고 또 마셨다.  


휴머니스트와 이성주의자가 적절히 모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조르바와 작가 바질이 주거니 받거니 했던, 그날 한 방에 동그랗게 모여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이 영화 속 장면처럼 떠오른다.


직장생활에 대한 기억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이 날이었다는 동기의 말에 '그래, 나도 그랬어'라며 뒤늦게 수긍을 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 단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설렘과 기대로 들떠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들이 이뤄질 것만 같은 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단합대회까지 한 우리는, 사무실이 어떻게 꾸며지고 있을까 궁금해 단체로 구경을 가기도 했다.


어떤 날은 칸막이 공사를 하고 있었고, 어떤 날은 책상이 들어와 있기도 했다.  


1996년 7월 1일. 출근 첫날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날, 기억은 망각의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날 이후, 우리가 한 모든 일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다음예고) 돈 좀 바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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