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를 다녀왔다.
시댁 큰 형님, 막내시누, 조카, 남편, 아들과 함께.
매해 되풀이되는 명절맞이는 단조로웠다.
장로, 권사 집안인 시댁은 명절차례를 지내기보다는 산소에 계시는 시부모님과 몇 해 전에 돌아가신 큰 시아주버님을 망월묘지공원에서 찾아뵙고 간단한 기도를 한 후 인근에 있는 선산으로 이동을 한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선조들이 계신 선산에서 '올해도 저희 왔어요'라며 기도를 하면 성묘는 끝이 난다.
점심은 큰 형님이 암수술을 하신 이후로 집에서 먹는 것보다는 근교 식당에 가서 먹고 카페에 가 차를 마신 후 헤어진다.
6남매 막내며느리인 나는 시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기억 하나
시어머님은 시집온 지 삼 년이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어머님에 대한 기억은 호박나물로 남아 있다. 아들을 가졌을 때 입덧이 심해 몇 달 동안 거의 먹질 못했다. 먹으면 토하기를 5개월까지 반복했다.
어느 날이던가?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가 호박나물을 해서 가져오셨다. 텃밭에서 직접 키워 햇빛에 꼬들꼬들 말린 호박, 들깨가루를 넣어서 만들어주신 나물은 '이게 뭐지', 까실 까실했던 입안에 침이 돌았다. 양판 가득해오신 호박나물을 앉은자리에서 다 먹었다.
지금은 모든 나물을 좋아하지만 이십 대에는 가장 맛없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어머님이 해 주신 호박나물은 달랐다. 내가 먹어 본 나물 중 최고였다. 호박나물을 먹은 후 내 입덧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머님과 추억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투병생활을 하던 어머님은 내가 첫아이를 낳은 후 돌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지금도 입맛이 없을 때면 말린 호박을 사 나물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머님이 해 주신 맛이 나질 않는다.
살아계셨다면 어머님께 레시피를 물어보는 건데, 이처럼 어머님은 나에게 음식으로 남아 계신다.
입덧을 잠잠하게 해 준 맛있는 한 끼, 그 따스했던 호박나물에 대한 기억으로.
기억 둘
홀로 남으신 시아버님은 큰 형님과 같이 사셨다.
아버님 또한, 첫 애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셨으니 실제로 만난 횟수는 그리 많지 않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새싹이 고개를 내미는 봄에도, 퇴약볕이 골목을 달구는 여름에도, 집집마다 노란 국화가 만발한 가을에도 눈보라 치는 겨울에도 아버님이 계신 자리는 한결같았다.
집 앞 골목 건너편 의자에 앉아 계시다 우리가 보이면, '오냐'라며 웃으셨다. 새까만 얼굴에 환하게 웃으시던 이는 유난히 희였다.
농사를 지으시는 것도 아닌데, 사시사철 해. 바라기를 하고 계셨던 아버님 얼굴은 볼 때마다 검게 타 있었다.
내 기억 속 시부모님의 모습은 이것이 전부였다.
친구들이나 주변에서 시댁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나에게 시댁은 그리움과 따스함이기 때문이었다.
기억 셋
시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그 자리에 큰 아주버님과 큰 형님이 계셨다.
나는 두 분을 부모님처럼 의지했다. 큰 아주버님은 73세에 담도암으로 돌아가셨다. 벌써 5년이 지났다.
암수술 후 병원에서 퇴원하신 다음날 바로 출근을 하셨을 정도로 자신이 하는 일에 빈 틈이 없으셨다. 투병을 하시는 동안에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마을 가꾸기를 비롯한 다양한 공익사업을 하셨다.
사시는 동안 단 하루도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다. 나에게는 아버님과 같으셨던 분이었다.
큰 형님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자네 남편을 꼬맹이 때부터 키웠는데, 성격이 순하고 착해서 참 이뻤다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그 시기, 직장생활을 하는 나를 대신해 남편병실을 지켜주셨다.
수술이 끝나면 일주일 동안은 아예 움직이지를 못하는 남편병실을 내가 직장에 가 있는 낮동안에 수발을 들어주신 분이다.
늘 '고생하네. 애쓰네'라며 다독여주신 큰 아주버니와 큰 형님은 나에게는 큰 그늘이었다. 남편 때문에 속이 상할 때도 시댁 식구들이 좋으니 마음이 금방 녹아내렸다.
아주버님이 살아 계실 때는 어버이날이면 항상 두 분께 선물을 했다. 나에게는 부모님과 같은 분이기에.
매해 성묘를 다녀올 때마다 어머님이 무쳐주신 호박나물과 사계절 까만 얼굴로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님, 언제나 우리에게는 아버지 같았던 시아주버님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