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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서제미 Sep 12. 2024

돈 좀 바꿔주세요.

LLM을 활용한 직업상담의 뿌리는

LLM을 활용한 직업상담이라니


"AI를 활용한 직업상담 강의가 있어요"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기계치에다 컴퓨터도 일에 필요한 거 외에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았던 터라,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활용한다는 거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해본 거라고는 '챗 GPT'에 관한 기사가 너무 많아 도대체 그게 뭔지 궁금해 '진짜 챗GPT활용법'이라는 책을 사서 몇 페이지 읽다 만 정도였다.


인터넷으로 관련 자료를 찾아서 읽자니 노안이 와서 눈이 아프고 책을 봐도 생소한 용어에 머리만 띵 할 뿐 더 이상 진도가 나질 않았다.


'이제는 직업상담도 인공지능을 활용해야 된다네요'라는 후배의 말에 내심 후유, 안도의 숨을 쉬기도 했다.


'퇴직하니 얼마나 다행이냐' 나 같은 아날로그 세대에게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 그저 어지러울 뿐이었다.  정년퇴직을 했다는 것이 차라리 위안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접목을 하는지.


"나도 강의 들어도 돼"

"그럼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라는 후배말에 올 초에 AI를 활용한 직업상담 강의를 두 차례 들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든 생각은 처음에는 놀라움,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하다니, 이걸 따라가지 못하면 참 살기 쉽지 않겠구나'라는 것과 '적절하게 활용을 하면 구직자에게 큰 도움이 되겠구나'라는 거였다.


이제 직업상담도 AI가 다 해주니 직업상담사가 없어지는 거 아닌가라는 우려를 잠시 하기도 했었다.  


강의를 듣고 난 이후, 든 생각은 앞으로 직업상담사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겠구나 거였다.


LLM을 활용한 직업상담이 도움이 되려면 직업상담을 하는 상담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LLM에게 정보를 얻으려면 질문을 잘해야 한다. 어떻게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질문을 잘하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구직자들의 특성을 전문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을 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글을 쓰면서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두 장의 사진이었다.


그 두 장의 사진에는 직업상담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고용보험법이 시행되면서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직업상담


1995.7.1. 고용보험법이 시행되면서 1996. 7월에 서울, 대구, 광주 3군데 지역에  취업알선 전문기관인 인력은행이 문을 열었다.  


시설은 지자체가  인건비와 운영비는 고용노동부가 제공하였고, 인력은 고용노동부 소속이었다.




내 직업상담의 뿌리는 광주인력은행이었다.


첫 번째 사진은 1996년 7월 20일, 두 번째 사진은 97년 4월 24일에 찍은 사무실 사진이다.  그때 당시 사진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혹시나 관련 자료가 있을까 싶어서 ChatGPT에게 물어봤더니 취업알선 전문기관인 광주인력은행은 1963년에 설립되었다고 나온다.  


땡, 1963년이 아닌 1996년 7월 1일이다.


수행했던 업무는 구직자와 구인기업을 연결해 주는 취업알선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했으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알려준다.


1. 취업알선:구직자가 자신의 능력과 조건에 맞는 직장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기업들이 필요한 인재를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


2. 직업 상담:구직자들에게 직업 관련 상담을 제공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취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고


3. 고용 정보 제공: 고용 시장에 대한 최신 정보, 구인 구직 동향 등을 제공하여 구직자와 기업 모두가 신속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함


4. 구인자와 구직자 연결: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과 노동자를 연결하여 구인난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


이러한 역할을 통해 광주인력은행은 지역 경제와 고용 시장의 활성화에 기여했다.라고 나와 있다.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맨땅에 헤딩이 시작되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7월 1일  문을 연 후 19일이 지난 7월 20일에 찍은 사진을 보면 책상 위에는 전화기와 파일뿐이다.


기업도 구직자도 광주인력은행이라는 자체가 생소했다.  


무엇을 하는 곳인 지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전단지를 만들어 거의 매일 홍보를 나갔다.


구인발굴을 하기 위해 차가 있는 직원이 하남공단 관리사무소 앞에 내려주면 2인 1조로 조를 편성해 하남공단 1번 도로부터 일일이 기업체를 찾아다녔다.


흔쾌히 맞아준 기업은 거의 없었다.  대다수 기업에서 했던 첫마디가  "우린 보험 안 들어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 구인발굴을 했다.  


구인기업들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이 신이 났고 직업상담을 통해 취업한 구직자가 나오면 우린 서로 환호성을 질렀다.  


구직자들 홍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구직자들이 모일 법한 곳들은 어디든 찾아다녔다. 아파트,  도서관, 대학 등등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맨땅에 헤딩이었다.  


초창기에는 하루에 구직자가 한 두 명, 많은 날도 열 명이 채 넘지 않았다.


그중에서 "여기 은행이죠.  돈 좀 바꿔주세요"라며 오는 사람이 다수였다.


구인업체든 구직자가 한 명이라도 오면 사무실에 활기가 넘쳤다.  구인발굴을 통해 구인기업이 들어오면 수기로 작성한 구인표를 책상 위에 있는 파일 속에 끼워 넣었다.


구직자도 마찬가지였다.  구직표를 수기로 작성하면 파일에 넣어 관리를 했다.


저 파일이 우리들의 무기이자 정보였다.  구직자들에게는 파일에 있는 구인기업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제공해 주었고 구입기업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백지상태에서 하나씩 직업상담의 역사를 써 나갔다. 구인기업과 구직자가 필요하다고 하면 주말에도 구직자를 데리고 동행면접을 다니기도 했던 나날들이었다.


지금 열리고 있는 채용행사의 시발점에는 서울, 대구, 광주인력은행이 있었다.  


구인구직만남의 날, 채용박람회를 비롯한 각종 채용에 관한 행사들이 인력은행 세 곳에서 시작이 되었다.  



희미한 기억, 주관적인 기록


핸드폰을 손에 들고도 '내 핸드폰이 안 보여.  어디 갔는지 전화해봐'라는 나이에 30년이 다된 기억을 되살려내기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자료들이 있으면 훨씬 더 생생할 텐 데 많지 않으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것들을 살려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기억의 파편들은 아주 주관적인 나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 저편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직업상담에 대한 고리를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


기억은 아름답게 왜곡되기 쉬우니, 어쩌면 내 속에 들어 있는 직업상담에 대한 것들은 아름다운 거 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초창기 광주인력은행 문을 열자 마자, 찾아와 "여기 은행이죠. 돈 좀 바꿔주세요"라고 했던 그 추억조차도 인공지능을 활용한 직업상담과 엮어내려 하는 걸 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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