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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서제미 Jul 23. 2024

모든 것이 지나가더라 2

아픔이 성장으로 


그날, 오후 7시에 수술실로 들어간 남편은 새벽 3시 15분에 나왔다.  꼬박 8시간 15분이 걸린 수술. 남편은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뼈가 부러졌다면 시간이 지나면 붙으면 되는데 철판이 살과 뼈 신경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대로 짓이겨져 버린 거다.  


첫날은 수술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살과 뼈, 신경을 정리하는 데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신경이 살아나야 했다. 

신경을 살리기 위해 오른쪽 장딴지에 왼쪽 발가락 부분을 붙여 놓고 기다렸지만  차도가 없었다.


발등과 발가락이 썩어갔다.


허벅지, 등, 머릿속 살들을 떼어내 이식하는 수술이 이어졌다. 


벚꽃나무에 새 잎이 나고, 장미가 피었다 지고, 배롱나무에 꽃이 세 번 피었다 져도 퇴원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수술을 한 일주일은 아침저녁으로  병실을 지켰다.


낮에는 시댁 큰 형님이 밤에는 내가.


 병원은 광산구, 아이들이 있는 친정은 남구, 사무실은 북구였다.


6인이 기거하는 병실 보호자용 긴 침대에서 선잠을 잤다. 신경은 바늘 끝보다 더 날카로웠다.  


병실 특유 소독냄새와 밤새 들락거리는 간호사, 환자들 앓는 소리에 잠들기를 포기했던 나날이었다. 잠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나였는데 그렇게 잠을 못 자고도 살아졌다.


 친정에 들러 대강 씻고 아이들 얼굴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서는 새벽 첫 버스를 타야 했다. 광산구에서 남구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 도중에 내려서 갈아탔다.


그 거리에서 나는 싸리 빗자루를 든 청소부를 만났다. 빗자루가 지나간 길은 전 날의 흔적들이 하나 둘 지워졌다.  담배꽁초도 종이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크고 작은 쓰레기들이 빗질에 실려 쓰레받기 안으로 사라졌다.


남편의 상처도 내 마음속 고통도 싸리 빗자루가 지날 때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난 기꺼이 저 싸리 빗자루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볼 때마다 하였다.


다섯 번째 수술을 했던 날.


발가락 다섯 개를 결국 살리지 못했던, 아빠가 보고 싶다는 초등학교 1 학년이었던 아들과 6살이었던 딸을 데리고 왔던 그날.  


회복실에 있는 아빠를 보고 그 어린애들이 밖에 나와서 둘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아빠, 괜찮아. 더 건강해지시려고 그러는 거야'라며 아이들을 품에 안고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병실과 친정, 회사를 오가며 살았던 9개월간.


97년 4월에 입원했던 남편은 98년 1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사무실에서는 단지 남편이 입원해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 누구도 그 상황을 알지 못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힘든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몸에 생긴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지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아픔 속에 머물 수 있기에 나에게 직업상담을 받으러 온 그 구직자들 마음에 상처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먼저 웃어야 했고, 긍정적이 되어야 했다.


온전한 육신으로 태어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고로 발가락을 잃은 그 사람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견뎌내고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내 고통은 세발에 피였다.


사무실에서는 여전히 밝았고,  여전히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남편은 결국, 장애 4급이 되었다.  


이식을 한 발바닥과 발등은 쉽게 살갗이 헐어서 문드러졌다. 몇 년간은 30분 이상 걷기도 힘들었다.  날마다 조금씩 걷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고 지금은 등산을 다니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아문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하루에 한 번 소독을 한다. 날씨가 습하거나 추우면 바로 상처가 덧 난다.  


남편은 투병 중에도 그 긴 세월 발가락을 잃고 오래 걷는 것도 오래 서 있는 것도 힘들 수밖에 없었을 텐데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입 밖으로 뱉어 본 적이 없었다.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자신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에게 '엄마는 아빠를 존경해'라는 말을 하곤 하였다. 


그 사고는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마흔 살이 되면 퇴사 후 전업작가가 되겠다는 희망은 꿈이 되었고 현실의 짐은 무게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이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나에게 찾아오는 구직자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을 보는 내 시선이 훨씬 따뜻해졌다.


무엇보다도 약한 이에게는 더 약한 사람이, 강한 이에게는 더 강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비장애인일 뿐이었다.  몸에 장애든, 마음에 장애든, 그것은 예고 없이 어느 한순간에 찾아왔다.


그 이후, 어떤 것에도 크게 동요를 하거나, 미리 걱정을 하질 않게 되었다.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해결책을 찾는 게 더 빨랐다.


항상 오늘을 살았다. 

지금, 이 순간을. 

눈이 부시게.

겸손과 겸허한 마음으로.


공지) 8월 24일부터 한 달간 유럽으로 가족여행을 갑니다.  기나긴 세월 견뎌 낸 남편과 아들, 딸과 함께.

글은 여행 다녀온 9월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응원해 주시고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9월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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