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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서제미 Oct 24. 2024

30대, 내가 60대 나를 찾아왔다 5

잠들지 않은 시간들

그 골목은 좁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와 어깨가 닿았다.  양 옆으로는 회색 시멘트를 바른 울퉁불퉁한 벽들이 이어져 있었다. 올망졸망 집들이 언뜻 보기에는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달랐다. 고만 고만한 사연들이 숨어있는 집들은 삼거리 골목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불현듯, 그 길을 걷고 싶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어릴 적 기억 속에 있었던 골목길.  분명히 이곳이 틀림없는데 나는 들어가는 입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미 그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몇 십 년의 세월이 골목길을 도로로,  낡은 집들을 아파트로 만들어 버렸다.



2003년, 그리고 2024년


2003년, 그 해 봄은 차갑고도 무거웠다. 대구지하철 참사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 그들의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던 시대, 그때의 세상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 아래에 숨겨진 수많은 고통과 차별을 묵묵히 덮고 있었다. 죽음조차 서러운 현실 속에서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같은 일을 해도 다른 대우를 받았다.


지하철 역사의 어두운 곳을 청소하고, 사람들에게 깨끗한 공간을 제공했던 이들이 정작 자신들의 삶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채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고된 노동은 그저 생계였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었으며, 세상은 그들에게 최소한의 권리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아래는 2003년 4월 3일 내일신문에 기고했던 글이다. 대구지하철 참사로 생을 마감했던 청소 용역 직원 3명의 장례식 기사를 접하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쓴 글이었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지금, 2024년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전히 비정규직은 존재한다.  여전히 그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일한다.  그러나 그때보다는 분명히 달라졌다.  목소리가 더 커졌고, 외침은 더 멀리 퍼졌다. 청소용역은 정규직으로 전환이 된 사례들이 많아졌다. 사회는 그들의 목소리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어두운 곳은 조금 더 환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길은 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은 과거의 기억 속에만 있지 않다. 2024년에도 그들의 삶은 불안정하고, 계약은 일시적이며, 사회적 안전망은 그들에게 완전히 닿지 않는다. 세상은 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저 덜 아픈 상처가 되었을 뿐,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마치 시들지 않는 꽃처럼, 지금도 피어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고, 그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세상이 조금 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더 나은 길을 함께 걸어주기를 바라며, 그들은 오늘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그 자리에 있다.  2003년의 그날처럼, 2024년의 우리는 그들 곁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서럽지 않은 날이 오기를 바라며. 


다시 마주한 2003년, 그리고 나


2003년에 서른 살 후반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때, 나는 불의를 견디기 어려웠고,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구지하철 참사 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을 마주하며 그 서러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떻게든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렇게 글을 썼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글을 꺼내어 읽는다. 그 시간 동안 내 앞에는 다양한 길들이 있었다.  포장도로, 비포장도로, 언덕길, 평탄한 길은 물론 동굴 속에도 터널 속에도 있었다.  그때 흘러내렸던 분노와 슬픔은 20년이 지난 지금 묵직한 침묵 속에 잠겨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 써 놓은 글을 읽으며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


그때는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살아보니 세상은 변하기보다는 그저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꾼다고 믿으며 노력할 때조차도, 세상은 저마다의 속도로 흘러갔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지혜로워지고, 때로는 체념하기도 한다.


2003년, 그 글을 쓸 때 나는 정의를 외쳤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같은 사람임을, 그들도 존엄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외침이 실현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살아보니 무엇인가가 바뀌기까지는 세월이 동반된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어야 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변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그때의 글을 다시 대하면서, 나는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배웠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믿는 바를 포기하지 않고, 그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다. 세상은 바뀌지 않아도 내가 바뀔 수 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바뀐다.


이제는 철학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한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한 세상의 냉담함이 그저 불의라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불의가 이 세상의 복잡한 구조안에서 태어난 것임을 안다.  이제는 그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내 삶의 의미를 찾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변화를 추구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너무 느리고 미약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느림 속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어떤 이는 젊었을 때 그 열정과 적극성이 나이가 들어 수동적이고 순응적이 된 것은 아닌가라며 반문할지도 모른다. 


자신 있게 말하지만, 결코 순응적이거나 수동적으로 변한 건 아니다. 


다만, 2003년, 30대인 내가 세상을 향해 분노했다면,   2024년 60대인 나는 세상을 바라보며 깊이 성찰할 뿐이다.  


30대에서 60대가 된 세월속에는, 예전에 살았던 골목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곳에 도로와 아파트가 들어선 것보다 더 깊고, 더 다양한 서사가 농축된 삶이 들어 있다.  


30대에는 내가 60대가 되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그때 나에게 60대는 갈 수 없는 나라였고, 꿈도 꾸지 못할 나이였다.  60대가 되어 30대, 40대에 써놓은 글들을 읽을 때 마다, 나는 온 몸에 전율에 오고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30대인 내가, 60대인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60대인 지금, 그대는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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