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수하는 아들을 응원하며
대학입시를 앞둔 아들의 고등학교 3년의 세월은 성실 그 자체였다.
학교와 학원, 독서실, 교회가 주로 시간을 보낸 장소다. 친구 관계는 비교적 폭이 넓다. 담임선생님이 쓴 생활기록부에도 증거가 남아 있다. 자기 생각이 있지만 주장하진 않는다. 리더십이 있는 친구가 무리에 있다면 따라가는 타입이다. 주목받기를 부담스러워한다. 집중력이 좋은 편이다. 대학 수시 원서는 6개를 제출할 수 있다. 5개는 의학 계열로 희망했다. 보험으로 공대를 하나 썼다. 국어, 영어, 수학 수능시험이 어려웠다고 했지만 최대치가 나왔다. 학종으로 원서 낸 대학에 2차 면접도 잘 봤다. 그럼에도 5광탈. 예비번호 2번, 4번 등에서 멈췄다. 안정권으로 원서를 낸 C대 소프웨어학부만 합격했다.
아들은 딸처럼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진 않는다. 물어보면 대답하는 정도다. 한 번의 물음표를 보내면 서너 개의 문장이 줄줄이 따라오는 딸을 기대하면 안 된다. 난 손톱에 네일을 하고 있다. 아들은 매니큐어를 혐오 수준으로 싫어한다. 엄마라는 특권으로 내게 손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아들은 딸의 사춘기로 내 감정이 격해질 때면 평정심을 찾도록 얘길 들어줬다. 고3 기간에도 주일예배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믿지 않는 친구들을 5명쯤 전도 했다. 토요일에 하는 성경 공부도 자원해서 했다.
지금 와서 말이지만 나는 주일예배만 드려도 되지 않나 생각 했다.
믿음의 선배로서, 엄마로서 입 밖으로 뱉기는 민망했다. 하나님께도 그만하면 잘 보였겠지 싶었다. 그랬다. 아들이 원하는 의학 계열 하나쯤은 합격할 거라 믿었나 보다. 나는 기도하면서, 찬양하면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라고 고백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다. 대학 입학 후보 번호를 받은 3개 학교만이 남았을 때 나의 고백이 거짓이었음을 알았다.
“ 아들, 엄마가 오늘은 하나님께 떼 좀 써보려고. 남은 후보학교에서 합격할 수 있게 기도 좀 하려고.”
“ 왜 떼를 써요? 저도 불합격되면 그 길이 하나님 뜻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기로 기도했고, 엄마도 결과에 상관없이 감사할 거라고 했잖아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아들에게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말했다.
‘하나님 아들이 예배도 빠뜨리지 않고, 전도도 하고, 드럼으로 봉사도 하고, 성경 공부도 하고, 기도도 했는데요. 주님 좀 챙겨주시지 그러셨어요?.’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분명 나는 그렇게 따지고 있었다. C 대학교 소프트웨어 학부 입학도 감사하기에 충분했음에도.
아들은 일단 공대에 입학했다. 나는 사실 고등학교 입학할 당시부터 재수는 못 시켜 준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말이 걸려서 아들이 재수하고 싶다는 말을 못 꺼내는 건 아닌지 마음이 쓰였다. 1학기 다녀 보면서 다시 도전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두 아이는 주말이면 집에 온다. 그날 밤 완전체로 모여 일주일에 있었던 얘기들을 나눴다.
“ 기도해 보고 있는 거야, 아들? 학교 말이야”
“다시 의학 계열 도전했다가 혹시 실패했을 때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까 봐 걱정돼요.”
“아들아,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면 반수 하지 말고 감사하며 다니자. 하나님은 사실 네가 무슨 직업을 가지느냐에 별로 관심 없으셔. 어떤 마음으로 네가 예배하고 하나님 사랑하는지가 중요하지. 솔직히 말해서 부모의 욕심일 수 있어. 네가 의학 계열 합격하면 당연히 기쁘지.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의 본질이 직업은 아니니까. 네가 열심히 공부한 것에 비해 아쉬움이 남아서 한 번 더 도전해 보겠다면 몰라도. 돌아갈 데는 있으니까.”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아들은 반수를 해보기로 했다. 본인이 하겠다고 결심한 거라 우리는 크게 스트레스받는 것은 없다. 그저 제때 입금만 시켜주면 된다. 지혜로운 왕이었던 솔로몬도 전도서에서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전도서 8:17)
하나님은 아들에게 지금 이 시간이 꼭 필요해서 인도하셨으리라 확신한다. 창조자 되신 하나님의 깊은 생각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다만 그분은 선한 분이므로 결국 좋은 것으로 만들어 낼 것을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보이는 것만으로 속상할 때가 있다. 대학 발표 후 아들은 괜찮다고 했다. 아들이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에서 ‘광야를 지나며’ 찬양이 흘러나왔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멀리 있는 옷방으로 가서 흐느꼈다. 지금 아들은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홀로 걷고 있다. 오롯이 아들만이 겪어내야 한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들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중에서)
자녀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 시간을 잘 소화하고 견뎌내는 것을 옆에서 지켜볼 뿐이다. 부모일지라도 도와 줄 수 없는 환경이 자녀에게 성장의 계기가 되리라. 아파도 피하지 않고 대면하여 감당해 내는 모습이 기특하다. 그 후 또 다른 도전을 향해 한걸음 발걸음 뗀 아들에게 마음 다해 응원한다.
“아들아,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