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은퇴이민 생활기
어느 순간에 뒤통수를 탕~ 하고 맞은 것처럼 멍하니 정신이 아득하다. 내가 이렇게 뒤떨어졌나?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아졌지? 나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필리핀은 한국의 7~80년대 생활상과 비슷한 게 많아서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동네 이발소를 가면 의자 하나에 투박한 가위,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날 선 면도날 등 정겨운 모습이 반갑다. 길가나 골목길마다 있는 조그마한 골목가게(여기서는 사리사리 Sari-Sari라고 부른다)에서는 온갖 생필품과 불량식품(?)들을 판다. 정류장이 없어서 도로 어디에서나 손만 들면 서는 버스와 지프니, 트라이시클 등의 대중교통수단... 동네 축제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울긋불긋한 노점상들... 초등학교 앞에서 꼬마 손님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스크림 장수와 솜사탕 장수들... 모두 모두 나를 예전 그 동심의 시절로 데려가준다.
또한 이곳에서는 문서와 서류를 중시하여 거의 모든 관공서나 정부기관에서는 종이로 된 신청서와 보고서를 사용한다. 요즘 들어 조금씩 디저털화되고는 있으나 아직 아날로그식이 대부분의 생활 속에 젖어있다. 그로 인해 일처리가 느리고 답답해서 짜증 날 때도 있지만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보다는 이 나라의 너무나 느긋한 국민성에 나름 적응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나 같은 은퇴이민자들에게는 그런 아날로그 방식이 오히려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잠시 한국에 볼일이 있어서 들어가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하루가 다르게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시스템에 눈이 휙휙 돌아간다. 마치 커다란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한다.
이런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 시내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요금을 몰라서 현금을 준비하고 올라타는데 앞사람들은 전부 뭔가를 화면에 대니 삑삑~하고 지나간다. 우리는 기사님 눈치를 살피며 현금을 통 속에 넣으니 잔돈이 없다며 좀 기다리라고 한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우리처럼 현금을 내고 타는 승객이 몇 명 있고 난 후에야 거스름돈을 받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통카드나 신용카드 같은 것으로 요금을 내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춘천에서 서울을 갈 일이 생겨 남춘천역으로 기차를 타러 갔다. 당연히 현장에서 티켓을 구매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매표소가 보이질 않았다. 역에는 도움을 청할 직원이 한 명도 없었고 모두들 뭔가를 터치하며 개찰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니 티켓 자동발매기가 여러 대 있어서 시도를 해 보았는데 행선지를 어디로 해야 하는지 어떤 노선을 선택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몇 번 해보다가 포기를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이럴 수가 있나??? 나도 예전엔 남들보다 컴퓨터를 잘 다룬다고 자부했었는데 ㅠ.ㅠ
어느 날은 근처 맥도널드 매장에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평소 햄버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그날은 왠지 마음이 끌려서 가게 되었다. 매장에 들어서니 눈앞에 키오스크라는 거대한 기계가 떡하니 가로막고 서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어떻게 하는 거지? 자세히 살펴보며 이것저것 터치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려서 뒤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결국은 최종 결제 단계까지 가지 못하고 매장 직원에게 구두로 주문을 하여 맛있는 햄버거 세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고 요즘은 어느 식당을 가든지 테이블에 있는 기기를 통해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고 결제까지 한 번에 이루어지니 마치 영화 속에나 나오던 신세계에 와 있는 듯하다. ㅎㅎ
내 마음은 아직 아날로그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디지털화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