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은 없어도 이론으로 민다.
나일즈는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아일린의 오피스에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I'm heading out. Thanks for today." (나 퇴근할게. 오늘 고마웠어.)
나는 문지방에 서서 인사를 건넸다.
"Yeah." (응.)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What's wrong? Did Eileen chew you out after we left?" (왜 그래? 우리 나가고 나서 아일린한테 또 혼난 거야?)
나는 그의 오피스로 들어가 가까이 다가갔다. 부하 직원들 앞에서는 차마 야단칠 수 없으니 따로 불러서 뭐라고 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It’s not that..." (그게 아니고...)
나일즈는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Then what?" (그럼 뭐야?)
나는 아예 가방을 의자에 던져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Damn it, this is all your fault." (에잇,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나일즈가 툭 내뱉었다.
역시 그랬구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일즈가 나 때문에 혼나고 나처럼 서류에 싸인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I deleted her photo because you said it was creepy. But then Eileen wanted to see her, so I pulled up Instagram. And get this. Eileen tried to zoom in and accidentally liked the picture. Then we panicked and googled how to undo it, but before we could figure it out, she switched her account to private. That means she thinks I'm a stalker, right? She’s not gonna show up tomorrow, is she?" (네가 그 여자 사진 저장한 거 소름 끼친다고 해서 지웠잖아. 근데 아일린이 그 여자를 보고 싶다고 해서 인스타그램을 보여줬거든. 그런데 아일린이 더 자세히 보겠다고 해서 사진을 확대하다가 실수로 ‘좋아요’를 눌러버린 거야. 그리고 그걸 어떻게 취소하는지 몰라서 둘이 구글 검색까지 했어. 그런데 그 사이에 그 여자가 계정을 비공개로 바꿨더라고. 이거, 그 여자가 날 스토커라고 생각한 거 맞지? 내일 데이트에도 안 나오겠지?)
나일즈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울상을 지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 눈물은 싹 들어갔다. 내가 나일즈도 징계를 당할까 봐 온갖 무시무시한 상상을 하며 전전긍긍하는 동안 파이낸스부서에서 제일 높은 부서장과 HR에서 제일 높은 부서장이 하하 호호 신변잡기를 나누면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벌떡 일어나 나가 버리려다, 어린애처럼 걱정하는 나일즈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녹아버렸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Pretend nothing happened and text her. ‘I’m looking forward to seeing you tomorrow evening.’"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문자 보내. '내일 저녁 만나는 거 기대돼.' 이렇게.)
나일즈는 내 확신에 찬 얼굴을 보더니 두말없이 내 말 그대로 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3분 후 "Absolutely!" (당연하지!)라는 답장이 떴다.
나는 신나서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손을 들었지만, 나일즈는 여전히 자신 없는 얼굴로 물었다.
"Why just one word?" (근데 왜 한 마디만 하지?)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내 손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It’s a text. That’s enough. What, you want her to write you an essay? She’s confirmed, so just focus on getting ready. And if she brings up the Instagram thing—" (문자인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여기다 논문이라도 써야겠어? 적어도 내일 데이트에 나온다고 했으니까, 준비나 잘해. 그리고 혹시라도 그 여자가 인스타그램 얘기를 꺼내면...)
"Yeah, I’ll just say my friend did it—" (응, 내가 친구가 그랬다고—)
"Absolutely not! Just say you were googling her, ended up on Instagram, and accidentally hit like. Whatever you do, do not mention that you told everyone in the office about her." (그런 말 하면 절대 안 되고! 그냥 인터넷 검색하다가 우연히 인스타까지 가게 됐고, 실수로 눌렀다고 해. 그 여자 얘기 네가 여기저기 하고 다녔다고 절대 말하지 마. 알았지?)
"But what if she still thinks I’m a weirdo?" (그래도 그 여자가 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Oh, Please!!." (아, 쫌!!) 나는 눈알을 굴렸다.
"Everybody googles their date before they go out. I bet she’s already looked you up. Speaking of which, pull up your LinkedIn." (요즘 데이트 나가기 전에 다들 SNS 검색하는 거 당연한 거야. 그 여자도 너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건 이미 다 찾아봤을걸? 말 나온 김에, 링크드인 좀 띄워봐.)
나일즈는 순순히 모니터에 자신의 링크드인을 열었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이 빼곡했지만, 정작 프로필 사진이 없었다.
"Where’s your photo?" (사진은?)
"I don’t have a good headshot." (잘 나온 헤드샷이 없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Did you at least give her your business card?" (그럼 그 여자한테 명함은 줬어?)
"I got hers, but I didn’t give mine. I don’t carry them around." (그 여자 거 받긴 했는데, 내 건 안 줬어. 안 가지고 다녀서...)
나는 또 한숨을 쉬었다.
"Why the hell not? If you tell her your name is Niles Brown, VP of Finance of a Fortune 500 company, how is she supposed to know you’re legit? Don't you think that is one of your strengths in the dating market?" (도대체 왜 안 가지고 다니는 거야? 솔직히 네가 '나일즈 브라운', 포춘 500 컴퍼니 재무부 부사장이라고 하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여자가 어떻게 알아? 네 직위가 여자들 만날 때 강점이라는 생각 안 해봤어?)
나일즈는 나보다 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서랍을 열어 명함을 주섬주섬 챙겼다.
다음 날,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나일즈는 브라운 컬러의 세련된 스포츠코트에 짙은 브라운 스웨이드 페라가모 구두를 매치한 사진을 내게 보내며 승인(?)을 구했다.
"Thoughts?" (어때?)
"Perfect!" (완벽!)
나는 엄지 척 이모지를 함께 보냈다.
"And one more thing—remember, you’re a great catch. Any ladies out there would be lucky to go out with you. Be confident." (그리고 한 가지만 더 기억해. 넌 어떤 여자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야. 자신감을 가져!)
"Thanks!" (고마워!)
나일즈는 활짝 웃는 이모지와 함께 답장을 보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있어, 나는 추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Oh, and one last thing. Whatever you do, don’t pull the ‘My place is within walking distance, wanna grab a drink?’ line. Got it?" (아,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저녁 먹고 '여기서 걸어갈 거리인데 우리 집에서 차 한잔하고 가' 같은 멘트 절대 하지 마. 알았지?)
나일즈는 그 말이 맘에 안 들었는지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게 내가 선을 넘었다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녀를 집으로 데려갈 생각이라 그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날 밤 나는 마이크와 집에서 영화를 보면서 안절부절 집중을 못했고 마이크는 왜 자꾸 폰을 들여다보냐고 물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보스 연애하는 거 코치하는 중이라고 했더니 마이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너 나 말고 제대로 연애해 본 적 없잖아." 하고 심장에 송곳 꽂히는 소리를 했다. "그래도 내가 책을 많이 읽어서 이론은 빠삭하거든? 너랑 그렇게 빨리 결혼만 안 했어도 실전에도 다 써보려고 했다고." 나는 마이크가 음흉하게 웃는 걸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나일즈는 기어이 일요일에도 아무 소식이 없었고 나는 하이스쿨 아들내미 프람 파티에 보낸 엄마 같은 심정으로 월요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참으로 긴 주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