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경력단절 끝에 재입사라니
그래,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잘 나가는 글로벌 회사 S사의 최상위 부서, 소위 전사의 경영을 기획하는 부서의 과장이었다. 뼛속까지 문과인 내가 기술의 원리 하나 모르면서도 최신 기술 동향 관련 기사를 걸러내어 보고서를 쓰고, 해외 유수 기업들과의 협력 회의를 위한 보고서를 요약하고, 이해하지는 못해도 기술 회의록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순전히 문해력 덕분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과적인 기본 개념조차 전무한 탓에 늘면 늘었지 결코 줄지 않는 전문 용어와 신기술에 짓눌리고, 보고 대상이 최소 상무 이상의 임원들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가 없으며, 특히나 본인의 몸은 사리고 윗사람의 비위는 잘 맞추느라 부서원들을 조이고 조였던 부서 임원의 까다로움에 시달리던 그 시절은 항시 퇴사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것만 빼면 참으로 좋았던 회사, 그리고 동료들과 선배들.
몇 년간 벼르며 상상으로만 내던지던 사직서를 드디어 제출했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꽤 오랫동안 잊을 만하면 나는 꿈에서 한국으로 역이민을 가 그때의 그 부서라 이름하는 낯선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부서 임원은 성질이 여전한 채로 대체로 내 꿈에 등장했고, 나는 긴 경력 단절로 인해 녹슬어 버린 업무 능력이 탄로 날까 싶어 마음을 졸였고, 구조도, 좌석 배치도 낯설기만 한 사무실에 가득한 익숙한 듯 낯선 듯한 얼굴들이 기억이 나지 않아 난감해하며, 나는 매번 두꺼운 폴더들을 꺼내 서류를 들여다봤다. 더없이 암담한 마음으로 무작정 시작하는 재취업 첫날.
그 꿈을 꾸고 나면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미국 TV시리즈 <환상 특급 The Twilight Zone>을 떠올리곤 했다.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지금껏 쓰던 방식과 다르게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혼란을 겪는 이야기(Episode: Wordplay)였다. 난데없이 아내가 “자기, 공룡 먹었어?” 같은 표현을 쓰기 시작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단어들은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키기 시작하고, 그는 좀처럼 말들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렇게 혼란스럽고 괴로운 하루를 보낸 그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어린 딸의 알파벳 책을 집어 드는데, 강아지 그림에 Wednesday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그는 처음부터 시작하려 한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게 된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과 소통하며 그들처럼 살기 위해. 그와 비슷한 심경으로 낯설어진 세계에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 나는 그 많은 문서들을 뒤적이다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생생한 아찔함으로 깨어나곤 했기에 매번 나는 그것이 꿈인 것에 감사할 만큼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꽤나 성실했으나 원하는 대로만은 채워지지 않은 시간들이 꿈에서 공백으로 작용을 했고, 그것은 이민의 현실을 사는 내 삶과 매우 겹쳐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새로운 공부를 했고, 그 기회와 바꾼 것들이 많아 열심을 쏟아부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미국의 경제 위기의 여파는 곧바로 이웃 나라의 졸업을 앞둔 한 이민자의 앞 길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포기한 더 많은 것들과 잠시 미룬 것들에 마음을 쏟고 의미를 부여하며 시간을 보내왔지만, 그 시간들은 반복되는 꿈 속에 공백으로만 등장하곤 했다.
바로 오늘, 나는 처음으로 다른 꿈을 꿨다. 아니, 다른 나를 만났다. 여전히 낯설었으나 조금 더 근사해진 사무실, 책상마다 앉아 있는 본 적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내 자리를 안내받았다. 자리에 앉자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 “언제 돌아왔어?” “얼마 전에 돌아왔는데 다행히 제 자리가 있네요.” “잘 돌아왔어!” 나는 경쾌하게 표정을 짓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연다. 서류 파일을 꺼낸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것처럼 서류를 들춘다. 매우 자신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떠졌다. 내가 더 이상 떨지 않는다는 사실, 더 이상 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녹슬어 버린 실력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눈을 뜨자마자 환희를 준다. 알파벳 책을 꺼내 드는 것은 자신감 상실의 증거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취해야 할 가장 마땅한 태도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낯선 땅에서 살아온 시간들이 실상은 공백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기억하며, 더 이상 나 스스로 그 시간이 축적해 온 의미를 박탈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상황은 변함없고 그저 마음이 달라졌을 뿐이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것을 악몽이라 부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