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 그리고 혈복

노견 간병일기 - 04

by 하루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면 내 시간은 온전히 내 시간이 아니게 된다. 하루가 병원에 입원한 후부터 내 시간은 병원의 시간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병원에서 아침식사를 급여하는 시간에 맞춰 병원을 찾고, 각종 검사들이 끝나는 시간에야 하루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하루 두 번 식사시간을 제외한 상담 예약 시간에 맞춰 한 번 더 병원을 찾는데, 이 모든 일정을 제외한 시간에 틈틈이 내 생활을 이어간다. 그야말로 일상의 시간은 그 어떤 연락에도 바로 대비할 수 있도록 '항시대기' 상태이다. ‘밥은 먹지 않았다'는 연락이 올걸 알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병원을 찾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9시가 좀 넘어 도착하면 복부초음파와 혈액검사 등 진행 후, 10시쯤엔 면회가 허락됐다.


눈이 빨개져서는 커다란 넥카라를 쓰고 앉아있는 녀석. 미니 캔하나를 받아서 하루의 입에 대주었다. 역시나 자발적으로는 먹지 않아서 손가락에 조금씩 묻혀서 입에 억지로 조금씩 넣어주었다. 중간중간 물을 입에 대주니 잘도 마신다. 기특한 녀석. 몸을 움직일 힘도 별로 없는 데다가 넥카라를 한 상태로 물그릇에 있는 물을 마시기는 힘들어 보였다. 밥과 물을 먹고 나니, 까무러치듯 눈꺼풀이 내려오더니 결국 스르륵 잠이 든다. 그래 그래, 안 그래도 힘도 식욕도 없는데 아침부터 온갖 검사에 억지로 밥에, 녀석 피곤하게도 하겠지..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밖을 나섰다.


해진 면회시간은 30분이지만 방문 때마다 밥을 먹이느라 면회시간을 초과한 덕분에 나는 병원 블랙리스트에 올라버렸을 거다. 하루는 자발적으로는 밥을 먹지 않았고, 병원에서는 입질 때문에 핸드피딩이 불가하니 콧줄을 장착하자고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먹이면 어느 정도는 억지로 받아먹고 있었기 때문에, 콧줄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오후 약속된 면담시간에 다시 병원을 찾았다. 오늘은 부치의 선생님과의 상담이었다. 혈액검사 결과 빈혈수치는 유지되고 있고, 신장수치는 4.2에서 3.5로 좋아졌다. 염증수치도 높고, 혈전수치도 측정불가한 상황, 게다가 초음파상 간결절도 보이는 상황이라고.. 림프관이 붓거나하진 않아서 전이로 보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신장수치를 2점대까지는 낮춰야 수술을 진행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처치들은 전부 하루가 '낫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고 있는 것'일뿐이다. 하루야,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해가 저물어가자 대설이 시작되어 눈발이 거세게 휘날렸다. 하루동안 벌써 세 번째, 이번엔 저녁밥을 먹이기 위해 병원으로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고, 앞자리 031- 병원이다.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부치의 선생님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하루가 오늘 오후에 혈압이 170대가 나오다가

갑자기 110이 나와서 초음파를 봤는데요,

혈복이 관찰됐어요.

응급으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바로 오실 수 있나요..?

이게 비장이 파열된 거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다발성출혈일 수도 있어요.

그 경우 개복을 해도 출혈점을 잡지 못하면

어려울 수 있어요..'


지금 가고 있다고, 당장 가겠노라고 알리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다. 순천에서 올라와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언니는 바로 출발하겠다고 했고 엄마는 잡히지 않는 택시에 눈발을 뚫고 걸어서 병원으로 오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가장 먼저 도착한 내가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그때가 오후 7시 반이었다. 한 번 더 수혈을 진행한 후 수술에 들어갔다. 뒤이어 가족들이 병원에 도착했고, 수혈 중인 하루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멘탈이 나가있었고, 혼비백산 상태 그 자체였다. 언젠가 찾아올 이별이 병원에서는 아니길 바랐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병원에서 수술하다가 다시 하루를 볼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이건 아닌데, 나도 나지만 하루도 아직 아무런 준비가 안 됐을 텐데. 하루한테 '무서워하지 말라고, 사랑한다고' 그 말고도 해줄 말도 알려줄 것도 많은데 말이다. 살면서 이보다 더 무력할 때가 있나 싶었다. 하루에게 수술 잘 끝나고 만나자고 사랑한다고 겨우 그 한마디만 속삭여주고 나와 대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