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소중하고 애틋했던 사람, 안녕
늦은 저녁이었다. 남자친구와 나는 어쩌다가 지난 날들의 카카오톡 채팅 목록을 보게 되었다. (물론 각자 보았고, 서로의 것을 보진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어져 있었다. 그래도 간간이 연락을 하던 6년 사귄 전 남자친구였다. 프로필 사진 속 그는 새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은 미래의 와이프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앞에는 현 남자친구가 있는데, 고작 전 남자친구 프로필 사진 때문에 정신이 나간 꼴이라니 스스로가 황당했다. 표정 관리도 안 됐다. 내 표정을 본 남자친구가 내 휴대전화 화면을 살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나 6년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 있다고. 그 사람 결혼한대. 이거 봐봐.“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여줬다. 남자친구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아아, 뭐야.“ 속으로는 조금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방법대로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해야했다.
나는 정말로 그 순간만 놀라고 멍해졌을 뿐, 당연히 그(전 남자친구)도 언젠가는 결혼할 줄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날도, 다음날도 그게 아니었다. 자꾸만 갑자기 멍해지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분명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친구들한테도 얘기하고 그들의 괜찮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6년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를 편의상 a라고 칭하겠다. a와 나는 오래 사귀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어 "우린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칭하곤 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무조건 그에게 말했고 우린 함께 술을 먹으며 20대 초·중반 나름의 고민들을 나눴다. 같은 학과 선배나 동기를 씹기도 했고, 취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정치 얘기로 싸우기도 했다. 기념일에는 ‘우리’의 미래를 그리며 편지를 썼고, 돈이 없어 걷는 데이트만 했지만 함께 손잡고 정처없이 걸어도 즐겁기만 했다. 가끔씩은 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주로 우는 쪽은 나였고 a는 말없이 안아주고 달래줬다.
내가 먹토(먹고 토하기)를 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도 a였다. 처음부터 안 것은 아니었고 사귄 지 3년인가 4년이 되면서부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집에서 5번 이상 토한 후 죄책감과 이러다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려 엉엉 울 때 가장 먼저 전화했던 사람도 a였다. 그때 a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나 같은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에 어떤 얘기도 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a에게 결국 사귄 지 6년 만에 이별을 고했다. 내가 마음이 사라져서였다. 사실 마음이 사라진 지는 오래됐던 것 같다. 그런데도 함께 지내온 세월 때문에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월을 놓기로 결심하며 a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 내 세상은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니, 우습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랬다. 20대라는 세월을 함께 해왔기에 a가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다. 막상 헤어지고 a가 영영 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힐 듯이 힘들었다. 심장을 칼로 갈기갈기 찢어서 도려내는 기분이 그런 기분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친구들에게 전화해 엉엉 울며 전화를 끊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전화를 끊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a와의 이별은 그렇게 힘들었다. 그 후에 몇몇의 남자친구들을 사귀었고, 썸남들도 만났지만 그 누구도 a의 빈자리를 채워줄 순 없었다. 누군가를 사귀어봤자 길어야 한 달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술을 퍼부으며 괜찮은 것 같은 사람처럼 살아갔다. 그러다가 몇 달 만에 a에게 연락이 왔다. "나 시험 합격했어." 준비하던 시험에 합격했다던 전화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 전화는 회사 점심시간에 걸려 왔었는데, 마침 내가 점심을 안 먹고 사무실에 남아 있던 터라 비상구에서 전화를 받았었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하며 울었다. 누군가의 합격을 그렇게까지 마음을 다해 축하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정말 잘 됐다고, 앞으로 잘 살라고 말했고, a도 나에게 잘 살라고 말했었다. 그 후에도 우리는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연락을 주고 받았다. 생일에는 치킨 기프티콘을 주고 받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욕을 하거나 무턱대고 엉엉 울며 전화를 했다. (주로 내가 그랬다)
그런데 그런 a가 이제 결혼을 한단다. 나와 모든 것을 공유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기분이란 참 이상했다. 미련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추억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저께 밤에는 밖에서 혼자 몰래 울었다. 그와 함께 들었던 노래를 들으면서 청승 맞게 울었다. 이제 정말로 연락할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a에게 연락해 마지막 인사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절대로 없다. 이미 a와 마지막 카카오톡을 주고 받을 때 작별 인사처럼 잘 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날이 마지막 연락이 될 것이라는 걸 직감이라도 했던 것마냥. 이제 정말 추억에서든 현실에서든 a를 보내주어야 할 때가 됐다. 너무나 애틋했던, 때로는 너무나 아프기도 했던, 그러나 찬란했던 나의 20대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한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과 새 출발선에 서 있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응원할 자신이 있다. 그의 첫 시험 합격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온마음 다해 응원할 것이다. 소중했던 사람아, 정말로 행복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