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은 없습니다
나는 대학생이 돼서야 첫 연애를 시작했다. 상대방은 몇 번의 연애를 해보았겠지만, 나는 첫 연애였기에 아주 미숙했고 무지했다. 심지어 가족관계도 안 좋았기에 내가 기댈 곳이라곤 남자친구뿐이었다. 그래서 내 모든 감정을 말했고 그에게 많이 기댔다.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말이 당시(2012년)에는 없다가 뒤늦게 생겨났던 것 같은데 그 말이 딱 맞았던 것 같다. 나쁘게 말하면 남자친구는 내 유일한 버팀목이자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그는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나를 늘 챙겨줬다. 나는 과제, 유인물 등을 유난히 잘 빼먹고 다녔는데, 항상 체크해 챙기도록 해주었으며, 길치인 내 손을 꼭 잡고 목적지까지 함께 가주었다. 시험 당일에 늦잠을 자서 "그냥 F를 맞겠다"며 모든 걸 포기하려던 나를 오백 번 설득해서 학교에 어떻게든 나오게 해 F는 면하게 해주었다. (조금 자랑하자면 나는 그 시험에서 1등을 했다. 시험을 보지 않았다면 그대로 F를 맞을 뻔했지만.) 변명을 하자면 학교와 나의 집은 왕복 3시간 30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간간이 하긴 했지만 항상 거지였던 내가 계산대 앞에서 쭈뼛거릴 동안 먼저 가서 카드를 내밀었던 것도 남자친구였다. (나는 테이블에서 최선을 다하여 느리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들 때문에 화가 날 때 내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들어주는 것도 물론 그였다.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나를 챙겨주던 남자친구가, 나는 아빠인 줄 알았나 보다. 보통의 아빠들처럼 내 모든 것을 다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인 줄로 크게 착각했었나 보다. 나는 그가 상처 받을 것도 생각 않고 헤어지자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처럼 내뱉었다. 그러고서 술래잡기를 했다. 이 게임에서 술래는 항상 남자친구였다. 나는 항상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숨었고, 나를 다시 찾고 붙잡는 것은 남자친구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술래잡기를 더 이상 그만하겠다고 했다. 그는 헤어지자는 나의 말에 처음으로 "그래"라고 대답했다. 처음 듣는 대답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술래가 된 나는 당연히 그를 잡으려 했다. 며칠이고 붙잡았는데 쉽게 붙잡히지 않았다. 그는 호소하듯이 말했다. "혜빈아, 나도 사람이야."
어떤 물체로 머리를 세게 맞아서 귀에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대해왔던 것이다. 그를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래도 결국 그는 나에게 다시 붙잡히고 사귀었다. 그 뒤로 몇 년을 더 사귄 후 내 마음이 다해 헤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나와 더 빨리 헤어졌다면 더 일찍 행복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 나를 '썅년'으로 저장해 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곧 결혼을 한다.
나는 이 글을 조회수 뽑아 먹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며, 그때의 전 남자친구에게 미련이 남아서 쓰는 것도 절대 아니다. 20대 초반 연애 당시 미성숙했던 내 모습을 나 스스로도 알고 있고, 그럼에도 지금 와서 돌이켜 봐도 소중하고 애틋했던 기억이었다는 것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그때의 연애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됐고 성장하게 되었다. 중요한 건, 지금은 각자 다른 사람과 새로운 추억을 쌓고 있고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언제든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것. 12년 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행복만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