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랭이 Sep 11. 2024

*

"안녕히 계세요."

하나는 몇 개 되지 않은 짐을 쇼핑백에 챙겨 들고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회사를 나왔다.

직원이 5명도 되지 않는 작은 사무실이었지만 몇 년간 근무하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사람들과 마지막이라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전철역]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철역에 도착한 하나는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렸다.

출근시간대와 다르게 사람이 얼마 없는 전철역을 둘러보다 하나는 자신의 옆에 놓인 쇼핑백을 살펴봤다.

처음 일을 배우기 위해 구입했던 다이어리와 때 묻은 사무실용 슬리퍼, 그리고 작은 탁상용 액자.

액자에는 사진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 짓궂은 표정의 남자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꽂혀있었다.

하나는 피식 웃으며 쇼핑백 입구를 둘둘 말았다.

그리고 전철이 도착한다는 알림 소리에 자리에 일어나 의자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쇼핑백을 버리고 미련 없이 전철에 올라탔다.


집으로 돌아오며 하나는 쓰레기봉투를 여러 장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는 포장지에 싸인 새 20인치 캐리어를 꺼내며 씩 웃어 보였다.

"이걸 이제야 쓰네."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휴가 때 쓰려고 구입했던 저렴한 캐리어를 지금까지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언젠간 쓰겠지 했는데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다.

캐리어를 열어 하나는 옷가지 몇 개와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작은 캐리어는 금세 채워졌고, 하나는 캐리어를 잠구고 현관 앞에 둔 뒤 사온 쓰레기 봉지를 집어 들었다.

캐리어를 챙길 때와는 다르게 굳은 표정으로 하나는 집안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살면서 채워둔 자신의 흔적들을 전부 없애기려도 하려는 듯 하나는 방 안에 남은 자신의 짐들을 모두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묵직해진 쓰레기 봉지를 내다 버리고 집에 돌아오자 처음 이사올 때처럼 텅 빈 모습의 원룸이 하나를 맞이했다.

깨끗해진 원룸 안을 둘러보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달력에 하나는 눈길이 갔다.

"이걸 깜빡했네."

11월이 펼쳐진 달력에 시한부라는 글자, 하나는 뚫어져라 달력을 쳐다보다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날 저녁, 하나는 번화가로 향했다.

화려하게 꾸민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던 하나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카페 안을 둘러보자 액자 속 남자가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하나는 그에게 다가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왔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남자가 물었다.

"응."

하나의 대답에 남자는 그제야 힐끔 하나를 쳐다봤다.

하나는 미소 띤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오늘은 왜 기분이 좋아 보여?"

하나의 표정에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기분 좋지, 니 꼬락서니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뭐?"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하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헤어지자, 이창호."

하나의 말에 창호는 코웃음을 쳤다.

"하.. 장난하냐?"

"장난 아닌데, 나 지금 진지한데?"

"뭘 뜬금없이 헤어지제, 내가 바람을 폈냐 뭘 했냐?"

"바람은 안 폈지, 차라리 바람이라도 폈으면.."

하나는 창호의 앞에 놓인 음료를 가져가 한 모금 마신 뒤 자신의 앞에 내려놓고 황당한 표정의 창호를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만난 시간이 3년인데, 그동안에 네가 나한테 뜯어간 돈이 얼만 줄 알아?"

"야, 뜯어갔다니? 빌려간 거지! 너 무슨 말을.."

"빌려간 다라는 건 말이야, 다시 되갚는다는 뜻이야."

하나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창호는 하나의 앞에 놓인 자신의 음료를 가져가 마시기 시작했다.

"내가 어제 계산해 보니까 못해도 오백만 원 돈은 되던데.."

"무슨 오백만 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금액을 듣고 놀란 창호에게 하나는 여전히 빙긋 웃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리고 날짜와 금액이 적힌 페이지를 펼쳐 창호에게 내밀었다.

자잘하게는 삼만 원부터 시작해 몇십 만원씩 이체한 내용들을 적은 다이어리를 보며 창호는 미간을 찌푸리고 신경질적으로 다이어리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놨다.

"야, 장하나. 너 지금 돈 때문에 이러냐? 남자친구가 사정이 안 좋으면 좀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너 이런 여자였냐?"

"왜 니 사정은 3년째 나아지질 않니? 너 나 만나는 동안 취직은커녕 알바라도 했니?"

"하.. 그건 자격증 학원 다니느라고.."

"자격증 학원? 고작 이틀 나가고 못하겠다고 때려치운?"

"아니, 그건 적성에 안 맞아서.."

창호가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창호의 핸드폰이 연신 진동을 울려댔다.

"아, 진짜..!"

창호는 신경질 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자신에게 온 알람을 확인했다.

하나는 테이블에 놓인 다이어리를 챙겨 가방에 넣고 창호에게 말했다.

"이젠 친구들이랑 게임 좀 그만하고 제대로 살아. 갈게."

"야! 장하나!"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창호는 다급하게 하나를 불렀다.

"나.. 너 여기 만나려고 택시비를 다 써서.. 삼만 원만 주고 가."

".. 푸핫..!"

창호의 말에 하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나가 웃자 창호도 어색하게 따라 미소 지었다.

하나는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며 말했다.

"음료값이야, 잘 마셨어."

그리고 뒤돌아 굳은 표정으로 하나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작가의 이전글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