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한 자국을 남기는
이혼을 결정하자 아빠는 우리 집 근처에 집을 구해 따로 살기 시작했고, 다음 주 주말에도 나와 동생은 아빠를 만나서 밥을 먹었다.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학교, 학원, 스터디 카페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를 반복했다. 고고한 백조의 발짓같이 살았다. 필사적으로 항상성을 유지했다. 가끔은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편하다고 생각했고, 가끔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것 같아 밤잠 못 이루기도 했다.
아빠의 흔적은 모두 비었는데 꽉 차 있기도 했다. 이상했다. 아빠는 65kg였는데 지나온 자국은 그의 배로 짙었다. 마치 가시광선 외의 색채 같았다.
아빠가 생활하던 모든 공간은 그대로 셋의 보금자리에 남아 있었고, 우리는 그 위에 새로운 삶의 흔적을 쌓아나갔다.
학생 때는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거짓말을 잘 못 하니까. 그냥 입을 닫는 게 편했다. 주제가 전환될 때까지 잠깐만 침묵하면. 자연스럽게 반응한다고 노력은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엄청 부자연스러웠을 거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떨어져 산다고 해서 나와 아빠가 가족이 아니게 되는 걸까? 남들에게 아빠를 내 가족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양육권이 없는 한쪽 부모를 앞으로도 가족으로 여길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가족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족이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의 기준에 날 욱여넣으려고 어떻게든 노력했다.
시간이 흐르고 고민 끝에 나름의 결론을 냈다. 이 글에 개인적인 모든 상황을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나와 동생, 엄마 그리고 나와 동생, 아빠는 명확하게 가족이다. 나의 모든 삶에서 우리는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앞으로도 우리는 가족일 것이다. 한 마리를 둘로 나누면 둘 다 재생해 온전한 두 마리가 되는 플라나리아처럼. 우리는 그런 가족이 됐다.
현재도 아빠와 따로 살고 있고, 서류상 세대원은 엄마와 나, 동생 셋뿐이다. 그래도 아빠는 여전히 나의 가족이고 일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선, 부모님의 이혼은 한쪽 부모와의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었다. 반으로 나누고자 해도 나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려준 인생 최초의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