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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아래 Oct 15. 2024

다음은 사랑을 '하는' 일

결혼 후의 사랑


나는 비혼주의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보고 자란 '결혼'이라는 것은, 특히 여자에게 있어 '결혼'이라는 것은 전혀 매력적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력적이기는커녕 절대 빠져서는 안 될 깊은 수렁 같아 보였다.


오래 사귀었던 친구와 결국 이별하게 된 이유도 서로의 '결혼에 대한 의지'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이 친구와 평생 이렇게 지내겠다고 생각했지만, 남자 쪽에서는 그것을 '내 사랑의 부족'으로 회귀시켰기 때문에 나는 참 곤란했다.


곤란하고 불편한 마음을 오랫동안 이어가다가 결국 내 쪽에서 이별을 고했다.


아마 남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끝까지 그 불편한 동거를 했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됐다면 내 쪽이 아니라 그쪽에서 내게 이별을 고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결혼은 해야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못 견디게 하고 싶어서 비로소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고,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성공 사례 중 하나이다.)


어른들이 결혼은 멋모를 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


즉 사랑에 깊숙이 빠져들었을 때, 다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기어이 스스로 문을 잠가버리는 행위다.


어쩌면 무모한 이 행위는 삶에 있어 몇 안 되는 비상식적이게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그것 뒤에 이어지는 일들이 종종 매우 비상식적이고 불가해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의 모순된 지점이 여타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그만의 유니크함을 만들며, 사랑스럽게 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이어지는 일이 주로 '이기'나 '이성적'인 것과 반대로 발로 되는 경우일 때 그렇다.


자신이 손해 보는 일, 전혀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 굳이?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일 같은 것들.


나는 사람의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지점'들을 사랑한다.​


아무튼 나는 남편을 만나 스스로 그 수렁 속으로 깊이 다이빙을 했고 굳게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사랑의 마지막 종착지는 결혼'이라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를 나 역시 끝내 인정하며 안정적으로 '세상'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독립적인 비혼을 그리던 내가 실은 누구보다도 세속적이고 예속된 관계인 결혼 속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행복에 겨워 기꺼이 그 예속의 굴레 속으로 들어갔고 부모님과는 달리 나는 성공적으로 제대로 된 사랑에 '정착'한 것이라 믿었다.


그전까지 한 번도 결혼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결혼 후 닥쳐올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미쳐 생각해 보지 못한 채 맞았다.



결혼 생활의 여러 어려움 중에서도 단연 가장 큰 파이는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


매우 당황스러웠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달성하기까지 우리 앞에 펼쳐진 시간이 너무 많았다.


열렬히 사랑에 빠졌던 내가 그에게 보냈던 편지들과 일기를 읽고 있자면 내가 변한 것인지 그가 변한 것인지 아리송했다.


어쩌면 그의 사랑은 변함없이 한결같았던 것이,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평소 그의 성품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고 꾸준하게 하는 일에 있어 그는 강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그와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마치 나르키소스처럼 그를 물속에 비친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내가 남자였다면 이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남자 버전'이랄까.


그런데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나와 전혀 다른 인간이 눈앞에 있었다.


결혼할 때 나는 남편이 99퍼센트 나와 일치한다고 느꼈고, 10년이 지나자 99퍼센트가 달랐다는 매우 주관적이고 비이성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남편은 무언가에 빠지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빠지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는 말도 함께.


나는 무언가에 빠져있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이 끌어당기는 사랑에 기꺼이 쟁취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무언가에 빠지지 않는 남편이, 그래서 실은 내게도 '빠지지 않았던' 남편이 한순간 너무도 멀게 느껴져 슬펐다.


마치 '사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들렸다.


한참 지난 후 우스갯소리로 했지만 남편은 마치 결혼정보 회사를 통해 최종 낙점된 사람과 결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한결같음으로 인해 그 후 '혹시 로봇이 아닐까' 하는 두 번째 억울한 누명을 써야만 했다.


사람을 깊이 아는 일은 세상을 아는 일과 같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그의 빛나는 부분을 한눈에 알아보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빛나는 부분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


따라서 결혼생활은 필히 콩깍지가 벗겨지는 즉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수반한다.


나는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절망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슬펐던 것이다.


하지만 빠져'만' 있는 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점점 알아간다.


사랑은 빠져나온 그 후가 더 길다는 것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이제 의지를 더해 열심히 사랑 '하는' 일이 남은 것임을.


'빠져드는' 일과는 달리 '하는' 일에는 맹목적인 확신도 설렘도 없고, 그저 묵묵히 정성을 들이는 일이라 다소 심심하고 멋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사랑이라는 큰 덩어리가 주어졌다.


그것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덩어리에서 분명한 '상'을 보았던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그'뿐 아니라, 그와 사랑에 빠진 '나'역시도 사랑하게 되는데, 그 덩어리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그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나의 아름다움을 포함한 '이상향'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덩어리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는' 일이고, '사랑을 하는 일'은 이제 그 덩어리를 정성껏 깎아내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삶과 같다.


사랑을 하는 일은 사는 일과 같다.


열정을 쫓아야겠지만, 열정만을 쫓아다녀서는 안 되는 일.


내가 찾은 열정의 대상에 지루하고 미련하게 하루하루 작은 정성을 다하는 일.


그것이 사랑을 '하는' 일임을 알았다.


나는 역시


괜히 또 슬퍼했다.




하마터면 사랑이 끝난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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