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아래 Nov 01. 2024

그림을 그려보자

슬퍼서 미술 학원을 끊었다.


크레파스처럼 생긴 오일파스텔로 내가 좋아하는 하늘을 그려보기로 하고.


하지만 세 번째 수업을 마치면서 선생님은 내게 '하늘' 전에 '기본'을 먼저 배워야겠다고 하셨고, 그 후로 나는 각종 과일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화가의 필터를 거쳐서 흰 도화지 위에 그려진 한라봉은 당황스럽게도 주황색이 아니다.


나는 수십 번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열심히 모작을 한다.


흰 스케치북 옆에 120색 오일파스텔을 펼쳐두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무슨 색을 쓸까'하는 단순한 물음만이 가득했고, 그 점이 좋았다.


그것은 내게 '멸치 똥 따기'에 대한 오래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어릴 때 우리는 멸치 다시를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에 맞추어 정기적으로 마른 멸치를 박스째 다듬는 일을 해야 했는데, 동생들은 그 일을 아주 힘들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단순한 반복이 좋았고, 덤으로 다른 이들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멸치 똥 따는 일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다른 이들에게는 고역일 때, 그 일에 대한 가치는 무한으로 올라가는 것 같다.​


또한 그 일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까지 뒷받침되면, 나는 마치 그 일을 통해 자아실현에 이르는 기분을 느낀다.​


멸치 똥 따기는 내게 최초로 그런 내적 희열을 느끼게 해 준 일이었다.​​




스무 장 짜리 작은 스케치북을 다 써가는 지금 알게 된 것은, 예술의 과정은 생각보다 예술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내게 '예술적'이라 함은, 온갖 멋지고 복잡한 철학적 아이디어들이 넘쳐나며 절절한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 예술을 해보니, 그것은 명상과 비슷한 일이었다.​


머릿속과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들을 비워내고 고요하고 단순해지는 일.​


어느덧 일상의 틈에서 스케치북을 꺼내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일이 들뜬 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완성된 그림은 초등학생의 그것과 같더라도,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유용하고 좋은 삶의 도구를 하나 얻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슬플 땐 빵을 사는 대신 그림을 그리는 걸로.




작가의 이전글 땅과 X축 같은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