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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아래 Oct 09. 2024

적당히 하는 일

가르친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애를 쓰면 세상의 무슨 일이든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교직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내게 사람들은 '정도껏'하라고 일러주었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적당히'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적당히 하는 법을 잘 모른다.


내가 그랬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일에 요령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도 일머리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 일 년 정도 맡아본 업무는 나름 정도껏 잘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잘 모르는 일은 적당히 하는 법을 모르게 마련이다.


적당히 할 수 있으려면 그 일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야만 '적당히, 정도껏'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교직 6년, 육아휴직 7년, 다시 교직 4년.


총 17년을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더군다나 어린아이를 성장시키는 일에 '적당히'는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내게 이건 '요령'이라기보다 '용기'의 문제이다.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 용기.



하지만 나는 가르치는 일이 늘 두렵다.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렵다.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까 봐 두렵다.


아이들에게는 안전한 보호자와 현명하고 지혜로운 안내자가 필요하다.


그것은 아이들의 마땅한 권리이자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하지만 나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가 없다.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누구보다 불안정하고 고뇌하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단에 서는 일은 항상 두렵다.


사실은 내가 겉만 어른인, 실은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투명한 영혼은 내게서 그 어린아이를 꿰뚫어 본다.


아이들에게는 숨길 수가 없다.


약점을 정확히 잡아내는 아이들의 순수한 영악함에 나는 늘 당황한다.


12살의 내가 그랬듯이.


진짜 어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절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적당히'는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내 안에서 확신으로 솟아나는 것,


그리고 삶을 통해 그것을 스스로 증명한 후에야 가르칠 마음이 조금은 생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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