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한 장에 담긴 계절

<사랑은 길고양이 같아서> 37화

by 양창식


20251015_124004.jpg



우리는 엽서 한 장 없이도 수많은 계절을 지나왔다.

말하지 않아도 닿을 거라 믿었던 마음,

쓰지 않아도 전해졌을 거라 확신했던 감정.

그리고 언젠가, 문득, 엽서를 고르던 날.

그것은 내 마음의 또 다른 기록이었다.



여행을 다녀왔다는 말도 없이, 나는 가끔 너에게 엽서를 썼다. 그건 보내기 위한 엽서가 아니었다. 마음속에서 네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는 일과 비슷했다. 엽서 속 풍경을 보며, 너라면 어떤 말을 할까, 상상하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나만의 문장을 덧붙였다.


‘잘 지내니?’

‘요즘은 뭘 좋아하니?’

‘혹시 가을엔 감기에 잘 걸리는 체질이었나?’

‘이 거리의 벚나무, 네가 보면 분명히 사진을 찍었겠지.’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문장들. 너에게 닿지 않을 말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너에게 엽서를 쓰고 싶었다. 어떤 건 단풍이 담긴 그림엽서였고, 어떤 건 오래된 서점에서 발견한 흑백 인화 사진 같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는 또 한 장의 엽서를 꺼내 들었다. 마치 네게 말을 걸듯, 인사하듯, 혹은 그리움을 조용히 꺼내듯.


나는 우리 사이에 진짜 ‘편지’ 같은 관계가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길게 적어 보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런 건 없었다. 우린 늘 말보다 ‘느낌’으로 대화했다. 눈빛이나 침묵, 혹은 아무 말 없이 건네는 커피 한 잔 같은 것. 그건 편지보다 더 정직한 마음이었다. 문자로는 다 담기지 않는 온도와 망설임이, 그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런 침묵의 교환이 점점 두려워졌다. 네가 아무 말 없이 웃으면, 나는 그 미소 속에서 불안을 읽었다. 네가 무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면, 나는 그 고요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마음은 여전히 너에게 닿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말이 많아졌다. 이야깃거리를 억지로 꺼내고, 너의 반응을 확인하고, 때로는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던졌다. 그럴수록 너는 조용해졌다. 나는 두려움 속에서 더 많은 말을 하고, 너는 피곤함 속에서 더 많은 침묵을 선택했다. 결국,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말이 끊기고, 눈빛도 흐릿해지고, 손끝조차 멀어졌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늦게 도착하는 마음.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엽서 뒤에 네 이름을 쓰고 나면, 묘하게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말 대신 쓰는 마음의 기도 같은 것이었다. 다 쓴 엽서는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그저 오늘 하루를 넘어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너 없는 나의 계절은 흘러갔다.


그렇게 모인 엽서가 이제는 꽤 된다. 나는 가끔 그 엽서들을 꺼내어 읽는다. 어떤 것은 짧은 안부, 어떤 것은 긴 독백.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안에는 아직도 ‘너’가 살아 있다.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이, 그 작은 종이 조각 안에서 숨 쉬고 있다. 묘하게도 그 엽서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너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한 번도 편지를 보내지 않았지만, 나는 엽서 없는 편지를 수없이 써왔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방식으로 너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했던 순간들을 스스로에게 되새기기 위해서. 나의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쌓여갔다.


네가 떠나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가끔 엽서 코너에 멈춰 선다. 이건 너에게 쓸 마지막 한 장일까, 아니면 또 하나의 시작일까. 어느 쪽이든 괜찮다. 나는 여전히 너를, 편지처럼 꺼내 읽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엽서의 끝에는 늘 같은 문장이 있다.


“잘 지내고 있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그날의 벤치, 그날의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