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떡볶이, 순대, 오뎅 200원
대학 새내기 무렵, 학교 앞 노점상이 강제 철거됐다. 덕분에 학교 정문은 깨끗해졌지만, 그와 함께 떡볶이 양념에 김밥을 찍어 먹던 추억도 철거됐다. 더는 버터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먹을 수 없었다. “김밥, 떡볶이, 순대”라는 소박한 글자가 걸려 있던 현판은 “00구청과 00대 총장의 항의로 삶의 터전이 짓밟혔다!”라는 현수막으로 가려졌다. 한동안 농성이 이어졌지만, 힘없는 노점상이 공권력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점상은 어디론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다 보니 가족과 함께 포장마차에 가던 일도 추억이 되었다. 이제는 녹색 PVC 비닐로 된 포장마차를 찾기 어렵다. 모락모락 김이 나던 오뎅 국물 속의 꽃게는 얼마나 오랫동안 육수를 우려내야 했던 것일까. 처량한 모습으로 땀과 피를 쏟아낸 꽃게 한 마리만이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지저분한 앞치마를 입은 채 빛바랜 주전자에서 밀가루 풀을 붕어빵 틀에 붓고, 하얀 다라이에서 퍼낸 팥앙금 한술을 그 위에다 털어내던 주인장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직 “오뎅 200원”이라는 글자만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이다.
포장마차에 걸려 있던 ‘김밥, 떡볶이, 순대’, 그리고 ‘오뎅 200원’이라는 글자는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신영복은 ‘삶’을 ‘사람’의 준말이라고 했다. 나는 포장마차에 쓰인 그 글자에서 삶과 사람의 진정성을 느꼈다. 삐뚤삐뚤 쓰인 글자였으나 한획한획에 밥벌이의 숭고함이 깃들어 있었다. 생명운동가이자 문인화가(文人畵家)였던 장일순의 일화집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 어떤 글이 정말로 훌륭한 글입니까?” 장일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길을 가다가 자네도 아마 봤을 거야. 왜 리어카나 포장마차에 ‘군고구마 팝니다.’ ‘붕어빵 팝니다.’ 하고 써놓은 글이 있잖아? 그런 글이 정말로 살아 있고 생명력이 있는 글이야. 꼭 필요한 글이지.”
- 장일순, 좁쌀 한 알 (서울: 도서출판 도솔, 2004), 259.
그 일화를 들으며 문득 상수 아저씨가 떠올랐다. 몇 년 전, 발달장애인이었던 그와 인연이 되어 얼마 동안 일과를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는 볼펜에 대한 도착증이 있었는데,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굶주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볼펜을 꽉 잡은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그가 노트에 정성껏 눌러쓴 글자 하나하나에 그의 영혼이 서려 있다고 생각했다. 종이에 영혼을 각인시키려는 듯 그는 정성을 쏟았다. 비록 그는 자신의 이름밖에 쓸 줄 몰랐지만, 글을 쓰며 맑게 빛나던 눈빛, 미세하게 떨리던 손가락을 잊을 수 없다. 때때로 그의 욕지거리를 듣는 중에도 나는 그의 솔직함을 동경했다.
그에 비해 식자의 글은 가공되어 있어 보기에 좋고 아름답지만, 개운치 못하고 속이 더부룩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수려한 글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먹물깨나 먹은 사람치고 자기포장에 능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이 들면 바로 붓을 꺾어야 돼.”라는 말에는 장일순의 진심이 묻어 있다.1) 어린이가 쓴 붓글씨의 순수함을 성찰의 거울로 삼고자 했던 장일순의 행동에도 그 마음이 우러난다.
삶의 터전, 그 사람의 됨됨이는 글쓰기를 통해 발견되기도 한다. 글자에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비들은 인격을 수양하고 도야하는 방법으로 글을 쓰며 난을 쳤다. 오래전, 수도승들이 영성수련을 위해 글을 읽고 썼던 것도 같은 이치이다. 참나의 진실을 마주하는 참선의 글쓰기는 나의 존재와 소명, 업을 발견하는 길이기에 무용하지 않다.
글쓰기의 과업 앞에 글자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나는 영혼을 눌러 담아 참나의 진실과 소명에 대하여 논할 것인가. 진득한 마음의 엑기스를 가져다가 글자로 옮겨 쓸 수 있을 것인가. 고민에 빠져 있던 순간, 장일순의 조언이 떠오른다. “이쁜 글씨가 잘 쓴 글씬 줄 아는가 본데 그렇지 않다네. 잘 쓴 글씨란 그저 정성껏 자신의 진실을 밝히면 되는 걸세.”2)
1) Ibid., 267.
2) Ibid., 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