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100일의 기록 87

by 포근한 바람

그는 아주 오래 고혈압 약을 먹었다. 성미가 급한 것 외에는 특별히 고혈압과 친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전쟁 때 실종된 외할아버지가 혈압이 높으셨을까? 외할머니도 관절이 안 좋은 것 외에는 돌아가실 때까지 큰 병이나 지병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못 들은 듯 한데 그는 일찌감치 고혈압 환자가 되어 꼬박꼬박 약을 먹으며 살았다. 그래서, 나이 들어 혈압 때문에 중풍이 올까 걱정을 하기는 했어도 자신이 암진단을 받고 세상과 이별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혈압은 꽤 여러 차례 그를 괴롭혔다.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그의 얼굴이 틀어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동생은 요즘도 이따금 그때 놀랐던 심정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한방치료를 하면서 구안와사는 치료되었지만 한동안 그는 매우 불편한 상태로 음식을 들어야 했고, 야릇한 표정을 지어지는 대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아 며칠 동안 앞이 캄캄한 채로 지내야 했던 것도 혈압으로 인한 일시적인 시신경 마비였고, 훨씬 시간이 지나 다시 시력이 흐릿해진 것도 고혈압과 그로 인해 판정받은 뇌경색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증상들을, 한방이든 양방이든 열심히 찾아다니며 치료했고 좋아지는 경험을 계속 했기 때문에, 그는 기본적으로 병원에 대한 신뢰가 깊은 편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든다는 좋은 병원에 입원할 것을 선택했고, 그 날 그 병실에서 그는 아주 안심한 표정이었고 정말로 편안해 보였다.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지속되는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음식도 삼키지 못하는 상태까지 가는 데 시간이 그렇게 적게 걸렸던 일에 대해서는, 지금 떠올려봐도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 날 이후 그 병실에서 보고 듣고 파악한 일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가 믿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 허탈해지곤 한다. 그들은 의사고 간호사니, 다 알아서 해주겠지, 그 동안 치료받은 것처럼 거뜬히 나아서 퇴원하려니 생각했을 텐데, 그 기대를 그는 생각보다 아주 빠르게 놓아버렸어서.


입원 후 보름이 채 되지 않아, 치료는커녕 진통제와 수면제와 항생제만 투여받다가 급격히 상태가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겨진 날이, 3년 전 오늘이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옮겨진 그 차가운 병실에서의 며칠이 그에게 어땠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불빛 꺼지지 않는 그 환한 중환자실에서 나온 이후, 분명히 아픈데, 앓는 소리를 하다가도 어디가 아픈지 물으면 아픈 데 없다고 세차게 고개를 젓던 모습에서, 그 공간, 그 시간이 많이 고통스러웠구나, 짐작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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