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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했던 봄, 견뎌야 할 봄

암환자 아내의 시점

by 복덕


바람이 부는 봄날이었다. 한가로운 마음으로 남편의 병원 정기검진 결과를 들으러 갔다. 그러고는 곧장 마산집으로 내려가지 못한 채, 서울 병원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동안 꼬박꼬박 정기검진을 받고, 피검사도 자주 받았건만 병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렇게 예고 없이 다가온 불가항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뿐이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의사 선생님은 병원 가까이에서 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집을 팔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남편 역시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치료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생각보다 먼 마산을 오르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다시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병원 가까이로 거처를 옮긴다는 건,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삶의 축을 옮기는 일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공간, 익숙한 거리, 마산의 햇살과 바람까지도 모두 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선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남편의 치료가 먼저였다. 집에 대한 미련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마산은 젊은 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아이들 키우며 웃고 울던 시간들, 사계절이 지나가며 벽에 스민 흔적들, 남편과 함께 늙어가던 평범한 하루하루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담담하려 애썼다. 이별을 결정하는 사람은 흔히 마음속에서 먼저 떠나온다고 했던가. 나는 이미 그 길을 건너고 있었다.


올봄은 유달리 바람이 자주 불었다. 좋아하는 봄날에 바람이 자꾸 불어서 걱정을 주었다. 면역력 걱정을 해야 하는 남편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병원 밖 나들이를 나서곤 하였다. 햇살은 따스해도 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결은 살갗에 닿을 때마다 차게 느껴진다. 작은 바람도 조심해야 하건만 그러면 나는 또 그새를 못 참고 옷 좀 두껍게 입으라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정작 남편은 남의 일인 양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는다. 봄바람 때문에 이렇게 잔소리를 많이 한 해도 없었던 것 같다.


그날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진료를 보는 날. 백혈구 수치가 낮아서 치료를 못 한다고 하였다. 걱정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렇게 바람맞고 다니더니, 남편은 걱정도 안 되는지 의사 선생님에게 불쑥 말한다. “마산 좀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기어코 다녀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백혈구 수치가 낮아 치료도 미뤄졌는데, 그 와중에 마산이라니. 가볍게 다녀오자는 말일지 몰라도,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작은 일탈도 큰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걸 남편은 왜 모를까.


하지만 정작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마산이 그리운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나도 그렇다. 거기엔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떠나오면서 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봄볕에 반짝이는 윤슬, 창가에 붙어 앉아 넋 놓고 내려다보던 풍경들, 이웃의 안부, 자잘한 기억들. 남편도 어쩌면 그런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걱정스러웠다. 단순한 바람조차 병이 되는 지금,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를 수 있을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혹여 마산에 다녀왔다가 또다시 치료가 미뤄지면 어쩌나, 그 생각에 속이 다 타들어 갔다.


그 봄날, 창밖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봄바람은 언제나 살갑게만 불어오진 않았다. 들뜬 꽃잎 사이로, 걱정과 슬픔도 함께 흩날리곤 한다. 나는 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바람이 지나가듯, 이 시절도 지나가겠지. 다만 그 지나감이 무사하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나는 봄을 좋아했다. 꽃 피는 계절이 오면 괜히 마음이 들뜨고, 거리에 밝은 색 옷이 많아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는 마음도 늘 봄에 피어났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이 봄은 나에게 설렘보다 불안이 먼저였다. 바람 한 점에도 마음이 쪼그라들고, 꽃잎 하나에도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병원과 집을 오가는 사이, 봄은 내게 무르익는 계절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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