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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윤 Apr 09. 2024

드디어 됐구나 생각했었다.

두 번째 나의 난임병원에서 드디어 보게 된 진한 두줄.

1. 큰 결심. 그 이름은 바로 '전원'

22년 2월부터 열심히 다녔던 첫 번째 난임병원을 뒤로하고

여성분들이라면 대부분 알만한 메이저 병원으로 전원을 하게 되었다.


거의 1년을 한 병원에서 인공수정부터 시험관 3차까지 하다보니

나에대한 서류만 몇십장이 되어서 들고 가는데도 꽤나 무거웠다.


병원 자체는 다녔던 병원과 크기가 비슷했지만

약간은 기계적이지만 프로페셔널 하셔서 오히려 나와 잘 맞는 것 같았다.


거의 20분이 넘는 시간동안 나의 그동안의 기록들을 꼼꼼하게 봐주신 선생님 덕분에

전원 후 첫 상담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얼떨결에 그렇게 신선 4차이자 시험관 5차가 시작되었다.



병원도 옮겼고 왠지 이번에는 될 것만 같은 그런느낌이었다.

난포도 이전에 비해서 더 많이 보이는 것 같아서 아직 내 몸이 잘 버텨주고 있구나 생각했다.



난자 채취 전까지 수 많은 과배란 주사를 맞으면서도

긍정적인 기운이 뿜어져나와서 이전보다는 기분 좋게 맞을 수 있었다.

난임 시술을 하면서 감정기복이 정말 심해졌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좋은 쪽이여서 다행이지 싶었다.



새로운 병원에서의 첫 난자 채취는 무려 20개의 난자를 채취할 수 있었다.

'역시 메이저급은 다른가보다' 스스로 되뇌이며 왠지 동결이 많이 나올 것 같은 예감에

채취 한 다음날 부터 동결비용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키게 된다.


하지만 슬픈 소식은 늘 찾아오는 법.

채취 이틀 후 병원에서 배아 상태가 좋지 못해서 5일 배양까지 가지 못하고

3일 배양 배아를 신선 이식으로 해야 한다는 소식.

그리고 동결 배아가 없을 수도 있다는 더 슬픈 소식....


그동안 난임 병원에서 시술을 하면서 나는 크게 운 적이 없다.

내가 울어도 내 마음을 100% 공감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울어봤자 라는 생각이 들었었고, 

정말 처량해보이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처음으로 소리를 내서 엉엉 울었다.



20개를 채취했는데도 달랑 2개, 그것도 5일 배양까지 못가서 3일 배양을 이식해야 한다니.

대체 모든 검사가 다 정상이라면서 왜 이런 시련을 주는건지 정말 슬펐다.



하지만 다음날 이식일정이 잡혀서 빨리 내 감정을 추스려야 했다.

이 또한 서글펐다.



이렇게 간절하게 임신을 하고 싶은데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리고 되기는 될까...?



사실 시험관 5차 신선이식은 거의 반 포기 상태였다.

배아도 중급이고 지금까지 3일 배양 배아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역시나 비임신으로 종결이 됐다.

하지만 동결이 없을거라던 것과 달리 느린 5일배아 즉 6일배아 한개가 동결이 된 것 이다.

비임신 종결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 슬픔보다 희망을 안고 나오게 된 것이다.


6일배아는 왠지 될 것 같았다.

드디어 나도 성공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물밀듯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2. 6일 동결배아는 처음이지? 우리 잘 해보자.

그렇게 동결 2차 이식을 시작하게 되었고

난임시술을 하고 처음으로 느린5일배아를 이식하게 되었다.


이 때는 남편이 이직을 하기 전에 잠시 한 달간 일을 쉬고 같이 집에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식을 하고 나서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평소였다면 매일매일 임테기를 하고 불빛에 비춰보고 스티커도 띠어보고

별 난리를 쳤을텐데

이 때만큼은 시간이 정말 잘 흘러간 것 같다.


그래서인가 이식 후 6일차에 임테기에서 두 줄을 보게되었다.



나름 경력자여서 그런지 나는 확실해질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침착해지고자 여러 주문들을 걸어가며

피검 전날까지 남편에게 임테기에 두 줄이 나온 걸 말하지 않았다.


드디어 피검날 남편에게 임테기가 두 줄이 나왔는데

아직은 흐리기 때문에 결과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수치는 나올 것 같다고 했다.


어째 남편이 나보다 더 침착했다.



피검사 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정말 피가 말랐다.

제발...제발...무종교인 내가 마음속으로 수백번의 기도를 했던 것 같다.


1차 피검 수치는 62. 

9일차에 한 거라서 수치는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했다.



'아...나 드디어 됐구나....'



내가 이렇게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를 연신 외치며

일주일 뒤 피검사를 기약했다.






3. 슬픈예감은 틀린적이 없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2차 피검까지의 일주일동안 임테기의 진하기가 일정했다.

이러면 예후가 좋지 않다던데..

그래도 임테기가 흐린걸 수도 있지 생각하며

제일 친한 친구의 결혼식 날이자 시댁 어버이날 모임이 있는 그날

2차 피검을 진행하게 되었다.


잔뜩 차려입고 서울에 있는 예식장에 가는길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피검 수치는 59로 화유가 되고 있는 것 같으니

복용하고 있는 모든 약을 중단하라는 말씀.

나름 예상을 했던 결과라서 그런지 썩 슬프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내가 무서울 정도로 덤덤했다.



남편이 시댁 모임은 가지 말자고 하기에

나는 괜찮다고 그냥 참석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임신이면 힐은 못신을 것 같아서 단화를 신고 힐은 혹시몰라 챙겨갔었는데

덤덤하게

예식장에 도착해서 힐로 갈아신었다.

마치 아무일도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웃으며 친구를 축하해주고

시댁 어버이날 모임에 참석했다.


남편에게 소식을 들은 어머님이 보자마자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신다.

갑자기 눈물이 핑돌았다.


그때 느꼈다.

나는 괜찮지 않구나.



좋은 날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나오려는 눈물을 꾹 삼켰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웃으며 모임을 마칠 수 있었다.


하루종일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슬프다가도 괜찮아지고 그리고 잊어버렸다.


다음날 엄마아빠를 만나서 엄마가 몸에 좋은 이것저것을 바리바리 챙겨주면서

꼭 안아주는데 또 눈물이 났다.

내가 울면 엄마도 울 것 같아서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렇게 또 눈물을 삼켰더니 괜찮아졌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갑자기 눈물이 난다...주책이야...)


내가 이때 즈음 인스타그램 난임계정에 글을 올린 구절 중

아직도 속상한 구절이 있다.

'이제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게 정말 무서워요.'





4. 잠깐 쉬어볼까?

약을 끊으니 일주일만에 생리가 시작되었고

나는 병원을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온갖 주사와 약을 받아내는 내 몸이 불쌍해서

시험관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쉬는 동안 내 마음과 몸을 추스르면서

자연임신이 가능한데도 그동안 내가 너무 밀어붙인 것 아닌가 생각하며

혹시 모를 선물을 기다려봤지만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5개월만에 병원을 내 발로 다시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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