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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윤 Mar 26. 2024

시험관은 한 번에 될 줄 알았지...

시험관이라는 문턱에 겁도 없이 들어서다

1. 나는 용감했다.

2022년 6월.

인공수정을 1차부터 3차까지 깔끔하게 0점대 수치로 종결한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험관 1차를 시작하게 된다.

그 때의 마음가짐은 '어차피 한 번에 될건데 뭐.'


만으로 33살, 모든 게 정상인 나는 시험관을 하면 당연히 한 번에 임신이 되는 건 줄 알았다.

매일 나의 배에 직접 과배란 주사를 맞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에 나는 성공할거니까.

그렇게 용감하게 약 2주간의 과배란 주사를 맞고 

처음으로 난자 채취를 하게 되었다.

7개의 난자가 채취가 되고 4개의 3일배양배아를 동결하게 되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동결 결과를 알리기 위해 전화가 왔을 때

4개의 배아를 3일 째 동결시키고 나머지 배아를 5일까지 키웠는데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는

그 말이 그 때는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2개의 3일 동결배아를 이식해서 한 번에 임신할거니까.'

그닥 중요치 않은 수치였다.


하지만 이식 당일 동결된 4개의 배아 중 2개의 배아만 상태가 좋고

나머지 배아들은 상태가 좋지 않아 한 스트로우에 동결을 시켰고

결국 폐기가 되었다는 소식.

그 때만 해도 그런가보다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처음 이식한 2개의 배아에 '블루'와 '베리'라는 귀여운 이름을 붙이고

임산부가 된 마냥 매일 매일을 조심해가며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이식 9일차쯤 되었을까.

이제 임신 테스트기를 하면 두 줄이 떴겠구나 하는 신나는 마음에

원포스트립 임신테스트기를 호기롭게 진행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른 단호박 한 줄에 뭔가 잘 되지 않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의 시험관 2차(동결 1차)는 그렇게 종결되었다.





2. 실망 속에서 피어난 작은 희망

배아가 최상 등급임에도 착상 수치조차 없었기에

선생님은 자궁내시경을 해보자고 하셨고

이 것만 하면 두 번째에는 될 거라는 희망에 두려움 없이 진행하게 되었다.

몇 개 있던 폴립을 제거했고 자궁경을 하면 착상에 도움이 될 거라는

희망적인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또 다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된다.


한 달도 쉴새 없이 나의 시험관 3차(신선2차)가 시작 되었고

이번에는 더 많은 15개의 난자가 채취되었다.

'이것봐 나는 아직 건강하다구'

쉼 없이 달림에도 나의 난소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음이 부단히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2일 뒤 배아의 상태가 좋지 않아 3일 배아를 신선이식해야 한다는 소식.

15개를 채취했는데도 그 중에 쓸 만한게 2개 뿐이라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하며 엄마와 함께 이식을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이식 전 선생님의 진료를 보게 되었는데,

배아의 발달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번에 신선 이식을 하고 나면

나머지 배아들은 아마 동결까지는 어려울 것 같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

그제서야 나의 배아들의 심각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이식 전부터 풀이 죽은 채로 진행을 하게 되었고

이식 후 8일차에 임테기가 한 줄인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 포기를 하게 되었다.

아직 끝이 나지 않았음에도 헬스장을 등록하고 런닝 머신을 뛰면서

다음 번 세 번째 채취때는 건강한 난자가 나오길 바랐다.


그런데 이게 왠일.

이식 후 9일차부터 피검사를 하는 당일인 11차 까지 

연한 두줄이 보이는게 아닌가.

내 일수에 맞는 진하기의 두 줄은 아니었지만 분명 두 줄은 두 줄이었다.


'수치가 나올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내 몸이 착상이 되는 몸이긴 한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수치는 나왔고 너무나 낮지만 나에게 소중한 숫자 바로 '5.7'

지금까지 단 한번의 두 줄을 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희망의 신호탄이었다.


'것봐 나 착상은 된다구.'


화유로 끝난 시험관 3차였지만 우울해하지 않고 4차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원동력.

15개의 난자 중 열심히 분열을 해주었던 2개의 소중한 배아들 덕분에

내가 지금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3. 금방이면 끝날줄 알았던 난임병원생활.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

그렇게 한 병원에서 1년여간의 난임 시술을 뒤로 하고

조금 더 전문적인 난임병원을 찾아 전원을 하게 되었다.


내가 시험관 4차까지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마는.

처음으로 전원을 하며 또 다른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뭔가 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전원한 병원에서는 꼭 성공을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22년 12월에 우리나라 난임 여성분이라면 알만한 메이저 병원으로 전원을 하게 되었고,

거침없이 시험관 4차(신선 3차)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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