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턍 Apr 25. 2024

"다 소중허지"

아들바위에 가면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주문진해변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소돌해변이 있다. 마을 전체가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라 ‘소돌’이라 한다. 타원형의 해변은 수심이 얕아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에 좋다. 바위가 많은데 그중 검고 각진 바위는 거대하고 힘이 센 소를 닮았다. 바다와 멋지게 어우러져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노부부가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얻었다는 ‘아들바위’가 있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고향 청양에 있는 엄마의 말을 전한다.     

 

“담엔 아들로 태어나고 싶당게”

엄마는 이남 삼녀 중 넷째다. 위에 오빠, 밑에 막내 남동생 사이의 딸이다. 본인 물건은 하나도 없었단다. 오빠와 동생 도시락을 가져다주며 교실 창밖에서 한글을 깨쳤다. 국민학교를 4학년에 입학해 졸업할 때는 상을 받고 졸업했다. 중학교는 아들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커서인지 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긴 숨과 함께 이 말이 나왔다.   

   

언니 네 명과 여동생이 네 명인 친구가 있다. 아들바위 이야기를 전하자 돌아가신 부모님께 알려드리고 싶단다. 딸들이 그리 잘해도 아들 없어 대가 끊겼다고 양자를 얻으려 하셨단다. 시어머니의 구박에 아들을 낳기 위해 아이 아홉을 낳은 엄마의 삶이 버겁다며 친구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 강릉이 친정인 신사임당이 결혼하고 17년이나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살았으니 아들바위는 그 후의 전설일 것이다. 우리 또래의 여자친구들은 대부분 ‘아들일 줄 알았는데 너였다.’의 주인공이다.    

  

나는 이남 삼녀 중 막내다. 막내다 보니 오빠, 언니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놀림도 많이 받았다. “막내야, 너 다리 미티서 주워왔어. 가봐 니 엄마 있을겨.” 모두 ‘재’ 자 돌림인데 나만 ‘선희’ 임을 증거로 내세웠다. 한글을 배우고 나니 더 확실해졌다. 결국 국민학교 1학년 때 책가방을 메고 가출을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던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울음이 터졌다. 엄마는 한걸음에 달려와 배 아파 낳았는데 무슨 소리냐며 품에 꼭 안아주었다. “스니야 니 엄마헌티 안 가냐? 다리미티 가봐” 동네 아주머니까지 놀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큰언니 재선, 작은언니 재희의 제일 예쁜 글자만 모아 이름 지은 엄마의 소중한 딸 선희니까.’     


한겨울 떡살과 쌀을 튀긴 뻥튀기를 줄 때, 다락에 숨겨 놓은 사과를 줄 때 이름이 적혀 있는 다섯 개의 바구니에 똑같이 나눠주었다. 추석에 송편을 빚으면 아버지와 오빠까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큰오빠에게는 책을 사줬고, 친구들과 연날리기를 좋아하는 작은 오빠와는 함께 연을 만들었다. 예쁜 얼굴에 치마와 인형을 좋아하는 언니는 머리를 양 갈래로 예쁘게 땋아 주었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축구와 야구를 좋아하는 선머슴 같은 나에겐 운동용품을 구해주었다. 오 남매 똑같이 고등학교까지 보내주고 대학은 장학금을 받던지 알아서 가야 했다. 우리 집보다 형편이 좋은 친구들도 여상을 나와 취업을 하는데 우리 세 자매는 모두 여고를 나와 대학을 갔다. 무언가 잘못했을 때 남들 앞에서 혼내는 일이 없었다. 손을 잡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물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물었다.   

   

설날 동네에 있는 큰할머니댁에 갔다. 설빔을 입고 신이 나서 뛰어갔다. “어여 나가! 정월 초하루부터 지지배가 재수 없게 먼저 온댜”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큰할머니의 호통이었다. 내가 처음 느낀 차별이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당숙모가 와서 달래도 가지 않았다. “세상에 재수 없는 사람이 어딨간디, 다 소중허지” 엄마는 나를 끌어안아주었다. 큰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이유로 엄마는 선조들의 제사를 모시고 왔다. 맨 먼저 차례를 지내 큰할머니댁에 아침 일찍 가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도 어릴 적 고향 동네 친구를 만나면 엄마의 안부를 묻는다. 가끔 딸에게 자신의 엄마처럼 구박하고 잔소리하는 본인의 모습에 놀란다고 한다. “그럴 때 선희네 엄마가 생각나” 친구들은 혼날 때마다 우리 집에 왔다. 엄마는 끼니를 챙겼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친구들은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좋았다고 한다. 엄마께 드리라며 선물이나 용돈을 챙겨 준다. ‘고마워잘슬게청양오면들려라몸건강해’ 90이 다 된 나이에 카톡을 한다. “똑같은 사람인디 왜 그리 차별 혔는지 물르것어, 지금은 시상 좋아졌지.” 


작가의 이전글 기다림을 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