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소개팅할 친구란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녀는 신입생이었다. 파릇파릇한 13학번. 국어 전공이었다. 처음 만나던 날, 노란색 재킷을 걸치고 단발머리에 환하게 미소 짓던 그녀는 마치 병아리 같았다.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상냥한 말투에 천생 여자다운 모습이었다. 친구에게 고마웠다. 밥 사겠다고 문자도 했다.
또 보고 싶었고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이 되냐고 물었다. 안 된단다. 산에 간단다. 그럼 주말은 괜찮냐고 물었다. 산에서 일요일 저녁에나 돌아오고 바로 뒤풀이가 이어진단다. 그럼 언제 시간이 되냐 물으니 다음 주 평일 중에 '시간 봐서' 연락하겠단다. 그렇게 그날은 연락처만 교환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산악부였다. 그 뒤로 그녀를 만나려면 암벽장으로 가야만 했다. 그녀는 평일에 주로 인공 암벽을 탔다.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진 산에 갔고 자연 암벽을 탄단다. 암벽 타는 그녀가 멋져 보였다. 그녀는 내가 좋다고 했다. 햇볕 많이 못 본 내 하얀 얼굴이 좋고 도서관에서 조신하게 앉아 책 읽는 모습이 멋지다고 했다. 나는 더 열심히 책을 읽었고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서관에는 오질 않았다. 나는 함께 공부하고 싶었는데 사귀는 동안 단 한 번도 도서관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연인이었다. 속세에 있으면 안 되었다. 나는 그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인공 암벽 15m 정상에서 환하게 웃는 그녀가 혹시나 다치진 않을까, 자연 암벽은 산 정상에 있다는데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줄 하나에 매달린 채 손 흔드는 그녀의 사진을 보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나와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할 순 없을까 조심스레 물었지만 자신은 산을 타야만 한단다. 그래야 살 수 있단다. 그녀는 자연인이다.
어느 날은 뜬금없이 마라톤 대회에 나간단다. 훈련을 시작한단다. 당분간 못 만난다고 했다. 우린 원래도 잘 못 만났다. 그녀는 늘 바빴다.그녀는 매일 새벽에 우리 학교 대운동장을 뛰었다. 학군단이 뛰는 이른 새벽 시간 그녀도 한편에서 뛰었다. 학군단은 몇 바퀴 뛰고 들어갔지만 그녀는 2시간을 내리뛰었다. 그냥 군대를 가. 네가 학군단보다 더 잘 뛰어. 알고 보니 고등학생 때부터 마라톤을 했단다.
어느 날 저녁에는 날 급히 불렀다. 대운동장으로 오란다. 자기 뛰는 모습 지켜보며 구간별 시간을 재 달란다. 대회가 코앞이란다. 그녀는 그렇게 2시간 넘게 쉼 없이 달렸다.
내가 네 남자친구니, 코치니?
너 설마 풀코스 뛰러 가는 거니?
넌 왜 국어 전공이니? 그냥 체대를 가.
그러고 보니 그녀는 늘 검은색 운동복에 운동화였다. 병아리 같았던 그 재킷은 첫날 보고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병아리가 아니라 독수리였다.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
그녀는 마라톤 대회 준비 기간 동안 금주를 했다. 체력 관리 차원이란다. 그건 다행이었다. 그녀는 말술이다. 새벽까지 술 먹고도 전화하면 목소리가 멀쩡하길래 분위기나 맞출 겸 한두 잔 하나 했더니 이미 몇 병 깠단다. 술 취한 친구들 다 집에 바래다주고 본인도 집에 간단다. 다음 날 오후에 전화가 온다. 해장하러 가자고. 난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만 먹어댔다.
그녀는 술 마신 다음 날이면 늘 말했다.
"오빠, 내가 술을 또 마시면 사람이 아냐. 나 속이 너무 쓰려. 죽을 것 같아."
정신만 멀쩡할 뿐 지독한 숙취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맞아. 독수리였다!
학생이라면 시험 기간에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시험 기간만이라도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그녀는 시험은 평소 실력대로 보는 거란다. 난 이때 직감했다. 얘는 나중에 임용고시도 평소 실력대로 볼 거란 걸. 아니 시험장에 안 나타날 수도 있다.
그녀가 학사 경고나 제적을 안 당하는 게 신기했다. 1학년을 마치고 그녀가 자기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자기 평소 실력대로 시험 봤는데 학점 평점을 3.0에 맞췄다며. 대단하긴 하다.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3.0은 맞춘 걸 보니 강의는 들었나 보다.
'뭐, 이젠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만!'
난 오늘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내가 너를 품기엔 너무 부족하다고, 넌 산이랑 잘 어울린다고, 산 같은 남자를 만나는 게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미안하단다.
나에게 그녀를 소개해 주었던 친구에게 문자 했다. 널 죽이겠다고. 당장 술이나 사라고.
그 뒤로 얼마 후에 그녀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가 노래방만 가면 김현정의 '멍'을 펑펑 울며 부른단다. 그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건 나 아니니? 그 노래를 왜 네가 부르는 거니? 가사 봐봐. 그 가사는 내 얘기라고!
잘못이었어 너를 만난 건 너는 사랑 따윈 관심도 없던 거야 다만 넌 니 뜻대로 모두 맞춰 줄 너 하나 밖에 모르는 내가 필요했을 뿐 다 돌려놔 너를 만나기 전에 내 모습으로 추억으로 돌리기엔 내 상처가 너무 커 바랄게 다음번에 너 누굴 사랑한다면 너 같은 사람 꼭 만나기를
김현정 <멍> 일부
졸업 후에 친구로부터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졸업 이후 임용고시는 두 번 보곤때려치웠단다. 그럴 줄 알았다. 그녀가 공부를 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된다. 임용고시는 그만 두고 글을 쓰고 있단다. 글이라니 역시나 안 어울린다. 그녀의 필명은 '도란도란'이다. 내 알 바 아니다.